미국 휴렛패커드(HP)사의 연간 총매출액에서 프린터 부문이 차지하는 비율 은약 10%에도 못미치지만 이 회사는 전세계 프린터 시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치에 있다.
HP에 대한 국내 PC사용자들의 첫인상은 무엇보다도 잉크제트 프린터를 먼 저떠올리게 한다. 데스크제트 시리즈로 국내 잉크제트 프린터 시장의 약 65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무리도 아니다. 잉크제트 프린터만 판매하고 레이저 프린터는 전혀 생산하지 않는 것을 이상스럽게 여기는일반소비자들도 의외로 많다. 그러나 HP의 레이저프린터는 단지 국내시장에 서만 구경할 수 없었다. 수입선 다변화 품목으로 묶여 있기 때문이다. 수입 선 다변화정책은 정부가 일본에 대한 무역역조를 개선하고 국내산업을 보호 육성한다는 취지에서 지난 77년부터 특정품목의 수입을 제한하고 있는 정책 이다. 여기에는 중요 부품의 원산지까지 포함돼 있다. 레이저 프린터의 경우지난 90년, 삼성전자와 LG전자가 핵심부품인 A4사이즈엔진을 자체 생산하면 서 추가되었다. HP 레이저 프린터의 경우 미국에서 생산하고 있지만 일본 캐 논사 엔진을 탑재하고 있기 때문에 국내시장에 들어올수가 없었다. 그러나 최근 정부가 미국에 대해 수입규제의 빗장을 열어 주면서 미국 HP사에만 수입을 허용했다.
HP가 수입을 추진중인 제품은 분당 4장을 출력하는 "5L" 및 분당 6장의 출력이 가능한 "5P"와 "5SI" "5SIMX" 등 4가지 모델로 이미 국내 유통망에 공급해 출하시점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
이번에 수입된 총 1만 7천6백대의 물량은 A4용지 6백dpi 고해상도 보급형 이주종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관심을 끌고 있다. 이르면 오늘부터 국내에 시판되는 1차 선적분 약 1만대중 대부분이 업체간 경쟁이 치열한 보급 형제품들이라 국내 프린터시장에 미칠 영향이 클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잉크제트 시장에서 그 위력을 실감해 온 업계는 레이저 프린터로 나머지 한쪽 날개까지 단 HP의 향후행보에 바짝 긴장하고 있다. 더욱이 전세 계레이저 프린터 시장에서 약 70%이상의 엔진을 공급하고 있는 캐논 등 일본업체들의 진출노력도 만만치 않아 A4용지 크기의 보급형 제품이 물밀듯 들어올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에 따라 그간 엔진개발에 막대한 연구비를 쏟아부었던 삼성전자와 LG전 자등 국내 엔진제조사들과 이에 보조를 맞춘 2백여 정밀부품 조립업체들의 경우 사업상 손실이 클 것으로 보여 이로 인한 파장이 심각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중소프린터업체들도 지난 6월 레이저프린터가 수입선다변화 해제품목 에서 제외됨에 따라 외산 엔진의 수입자제에 맞춰 판매계획을 수립했던 터라 일정에 상당한 차질을 빚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수입규제해제와 관련해 가장 민감하게 반응을 보이고 있는 업체는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국내 엔진공급업체들. 그동안 이들로부터 엔진을 공급받아온완제품업체의 대거 이탈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일본 엡슨사와 긴밀한 관계에있는 삼보컴퓨터를 비롯, 큐닉스컴퓨터.쌍용정보통신 등은 그동안 삼성전자 와 LG전자가 엔진을 자체 생산하는 유리한 조건을 앞세워 자사의 완제품 가격을 파격적으로 인하해 온 것에 강한 불만을 품어왔다.
HP의 예외수입은 지난 4월 워싱턴에서 열렸던 제 18차 한미 통상협상에서 합의된 사항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합의된 사항 중 정작 중요한 내용은 다른 데 있다. 오는 96년부터 레이저프린터 수입규제를 완전 히해제키로 한 점이다. 더구나 이같은 합의는 이번에 처음 성사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지난 93년에 있었던 양국간 반도체 덤핑협상에서 우리측은 국내에 진출해 있는 IBM.HP.애플 등 3개사로부터 측면지원을 받아 협상결과를 원만하게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 대가로 정부는 이들 3개사에서 예외수입을 일정 수량 허용했고, 95년부터 수입규제를 완전 해제키로 합의한 바 있었다. 정부는 이미 수차례에 걸쳐 미국측의 요구대로 수입규제 해제를 약속했다. 또한 HP의예외 수입에는 전과 달리 수량과 기간에 어떠한 제한도 달지 않았다. 언제라도 원하는 수량을 수입해 올 수 있도록 보장해 준 것이다. 그 보장에는 모든 미국 제품들이 해당된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은 정부가 더 이상수입규제를 고집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에 대해 국내 레이저프린터업계는 수입 규제 해제의 당위성을 상당부분 인정하면서도 정부가 자국기업을 보호하기에 앞서 미국의 통상압력에 먼저 굴복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고 강력하게 비난한다. 또한 품목 자체의 일관 성있는 대응이라기 보다는 다른 품목에 밀려 수입규제 해제의 우선 대상으로 지목하고 있다고 반발한다.
물론 업계의 반응과 달리 소비자 입장에선 반가운 소식일 수 있다. 우선업체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더 저렴한 가격에 좋은 품질과 애프터서비스를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업 그 자체로 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국내 생산 공급에 따른 산업규모가 축소될 뿐만 아니라 관련업계에 미칠 타격도 크기 때문이다. 특히 레이저 프린터 시장은 복사기시장과 비슷해 시스템을 일단 도입하면 수명을 다할 때까지 토너.드럼 등 소모품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그 비용은 완제품 조립가격의 20%가량을 차지하며, 수명을 다할 때까지 정기적으로 매번 일정 액수가 지출되어야 한다.
이렇듯 부가가치가 높은 만큼 시장에서 시장점유율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 를가진다. 때문에 이해관계의 대립도 그만큼 첨예하다. 미국기업들이 국내시장진출에 적극적인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런 맥락에서이다. 우리나라는 현재동남아에서 가장 큰 시장일 뿐 아니라 잠재력이 무한한 중국시장 진출의 교두보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같은 상황에서 그동안 뜨거운 감자였던 레이저프린터 수입규제 논란은 일단락되면서 국내 이 분야의 판도에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될 것으로전망된다. 정영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