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정보통신 비사 소리없는 혁명 (42)

체신부는 정부수립 이후 두가지 고질적인 전화문제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었다. 첫째는 만성적인 전화적체였고, 둘째는 극심한 통화체증이었다. 한편으로는 전화수요는 급증하는데 공급이 따르지 못하자 빨리 달아달라고 아우 성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전화를 걸어도 통화중이거나 잡음이 심하고 통화중 에끊어지는 일이 많다고 해서 불평이었다.

그런데 이 두가지 전화문제는 기존의 기계식 교환방식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두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잡기 위해 추진된 정책이 전자교환기의 도입과 전화망의 현대화계획이었다.

전자교환기의 도입과 전화망의 현대화계획은 따로따로 추진되었다. 그중 먼저 추진된 것이 전자교환기 도입정책이었다. 정부가 전자교환기를 도입하기로 방침을 확정한 것은 1976년 12월이었고 제1기종으로 채택된 BTM의 M10C N이 서울의 영동과 당산전화국에서 개통된 것은 1979년 12월이었다. 이어서1979년 11월에 제2기종으로 AT&T의 № 1A를 채택함으로써 전화의 대량공급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전자교환기가 도입되면서 전화공급이 부쩍 늘어 1982년부터 연평균 1백만 대이상을 공급했다. 1970년대 10년동안의 연평균 23만대, 그리고 4차5개년계 획기간인 1977년부터 1981년까지의 연평균 43만대에 비해 엄청난 수치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1983년부터 기계식 교환기의 공급을 중단함으로써 완전한 전자교환기시대를 열었다. 그 결과 1985년을 기점으로 전화의 공급이 수요를 상회하게 되어 농어촌의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전국 어디서나 신청한 즉시 전화를 달아 줄 수 있었고, 이어 87년 6월에는 전국의 전화를 자동식으로 바꾸었으며 다시 9월에는 1천만대를 돌파했다. 이로써 공급측면에서의 전화 문제는 깨끗이 해결되었던 것이다.

한편 전화망의 현대화계획은 농어촌전화의 광역자동화사업과 전국자동즉시 통화망 구축사업으로 나뉘어 추진되었다. 전자는 농어촌은 물론 외딴 섬마을 까지 전화를 가설해 주는 매우 방대한 사업이었다. 교통망에 비유하자면, 전 국방방곡곡의 마을까지 전화의 고속도로를 닦는 것으로,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만큼 과감하고도 혁신적인 발상이었다. 후자는 전화 가입자 가 다이얼을 돌려 전국의 모든 가입자는 물론 세계의 모든 가입자와 즉시통 화가 가능한 전화망을 구축하자는 것이었다.

자동즉시통화가 가능하려면 첫째, 모든 시내전화가 자동화되어야 하고, 둘째 모든 시외전화 및 국제전화가 자동화되어야 하고, 셋째, 전화국과 전화 국사이를 연결하는 국간전송로가 충분히 갖춰져야 한다. 그런데 기계식교환 기시절에 자동즉시통화망을 완성했던 선진국과는 달리 우리는 전자식교환기 시절에 자동즉시통화망을 구축했기 때문에 가장 최신화된 통신망을 단기간내에가장 경제적으로 완성할 수 있었다.

농어촌 전화의 광역자동화는 자동화와 광역화라는 두가지 사업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자동화란 전화의 교환방식을 수동식에서 자동식으로 바꾸는것이고 광역화사업은 시내통화권을 넓히고 가입구역을 넓히는 것이다. 이처럼 광역자동화사업에는 자동화와 시내통화권의 광역화, 가입구역의 광역화 등 세가지 사업이 내포되어 있었지만, 자동화가 선행적인 필수조건이기 때문에 광역자동화라는 하나의 종합사업으로 묶어 추진했다. 한편 육지 가까이있는 섬에 자동전화를 가설하여 육지의 시내통화권으로 흡수하는 안서전화사 업도 광역자동화사업에 포함시켰다.

우리나라의 농어촌 전화는 60년대 이후 자석식 전화에 의해 보급되었다. 1면1우체국정책에 의해 읍.면단위로 1개이상의 우체국이 설치됨에 따라 우체 국단위로 자석식 교환대를 설치하여 전화를 보급했다. 한편 군 단위에서는 70년대에 들어 스트로저 방식의 자동교환기가 설치되었고 일부에서는 공전식 교환기도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수동식 교환기의 경우, 가입자의 수용과 소통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적체는 누적되었고 시외전화는 체증을 면치못했다. 자석식이나 공전식과 같이 교환원을 거쳐 통화가 이루어지는 수동식 교환 기의 시내통화권은 그 수용능력으로 볼 때 읍.면단위로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자석식 교환기의 수용능력은 5백회선이 한계점이었다. 그러나 교환원을 거칠 필요가 없는 자동식 전화국에서는 한 도시에 여러개의 전화국이 있듯이복국화라는 개념에 따라 1개 시내통화권에 여러개의 전화국을 설치할 수 있는데 실제로 그것이 경제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종래에 읍.면 단위로 세분화되어 있던 시내통화권을 시.군 단위로 굵직굵직하게 묶는 작업이 시내통화권의 광역화였다.

당시의 시내통화권은 자동식전화가 1백65개, 수동식전화가 1천4백34개구역 으로 모두 1천5백99개 구역이었는데 그것을 1백52개 구역으로 통화권을 넓히기로 했다. 그런데 시행과정에서 현지주민의 요청에 따라 5개가 축소되어 1백47개 통화권이 되었다.

그 결과 농어촌지역은 전화자동화가 이루어지고 시내통화권이 11배쯤 넓어짐과 동시에 전화요금이 시내요금으로 자동 인하되는 일거양득의 혜택을 받았던 것이다.

전화국의 가입구역은 기술적.경제적 이유 때문에 전화국으로부터 반경 5km 이내를 적정한 범위로 잡고 있었다. 그러나 수동식 전화를 공급하고 있는 농어촌 전화국에서는 가입구역이 평균 반경 1.5km로서 매우 협소했다. 그 이상의지역은 준가입지역이라 하여 가입 희망자가 별도로 선로비용을 부담해야 전화를 달아주었다.

따라서 지역 주민들의 불만이 컸고 전화를 달아주는 과정에서 부조리도 있었다. 체신부는 최소한의 통신 혜택을 준다는 정책적인 배려에서 1971년부터 198 1년까지 11년 동안 법정리동과 행정리동 순서로 준가입구역에 5만 6천여대의 위탁공중전화를 설치했다. 그러나 낙후된 기술에 의해 무리하게 가설했기 때문에 고장이 잦고 통화 품질이 불량하여 또 다른 불만을 낳게 되었다. 뿐만아니라 전화 가설을 원하는 주민들은 늘어나는데, 체신부가 이에 부응하지 못하자 농어촌의 전화문제가 농어촌 차별대우라는 정치적인 문제로 발전하게 되었다. 따라서 광역자동화사업에는 가입구역의 광역화계획도 포함하게 되었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리동단위 공중전화 설치지역을 가입구역으로 흡수하는 한편, 2만 4천7백여개에 이르는 10호 이상의 자연부락까지를 가입구역으로 확장했다. 10호 미만인 부락이라 할지라도 가까운 선로에서 500m 이내는 가입구역으로 지정했기 때문에 산간벽지의 주민들까지 전화 혜택을 입게 되었다. 1984년부터 시행된 이 계획은 1987년 6월에 완료되었다.

이처럼 농어촌전화망 현대화작업은 한국통신이 출범한 해인 1982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전국의 자동화가 이루어진 1987년에 완료되었으나, 그와 같은 방대한 계획이 추진된 것은 훨씬 오래 전의 일이었다. 군단위통신망 광 역화계획이 수립된 것은 1978년 10월의 일로서 당시의 체신부 계획국장 정규 석의 작품이었다. 아우성치는 전화적체 문제의 해결책을 모색하던 체신부는 1975년 우선 정책 기능과 집행 기능을 분리하기로 하고 정책을 전담할 기구 로계획국을 신설한 바 있다.

1977년 7월 제2대 계획국장에 취임한 정규석은 행정직이면서도 기술에 대한 이해가 깊고 두뇌 회전이 빠르며 업무 추진력이 강한 개성파였다. 그는 1980년대 후반까지는 전화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겠다는 전제하에 전화 대량공급계획을 세우는 한편, 농어촌전화의 광역자동화계획이라는 당시로서는 생각 하기 어려운, 대담한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평택군을 시범지역으로 지정하여 시험운용을 했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 자동화를 추진하면서 전자식이 아닌 기계식으로 추진했기 때문이다.

후임 계획국장 이응효는 기술직으로서 체신부 간부 중에서는 첨단 기술의 흐름에 대한 이해가 가장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농어촌전화 현대화계획을 그대로 밀고 나가되 교환방식을 외국의 예에 따라 전자식으로 바꾸기로 했다. 즉, 군단위 모국에는 디지털교환기를 설치하고 읍.면단위 자국에는 모국 교환기의 일부분인 원격교환장치(RSS)를 설치하여 전 가입구역을 자동화한다 는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디지털교환방식의 채택이 여의치 않는 곳에서는 무인 운용이 가능한전송로집선장치방식을 채택하기로 했다. 이와 같은 농어촌전화현대화계획이1980년 4월에 확정되었다.

이처럼 디지털교환방식을 채택하여 읍.면 단위로 되어 있는 시내통화권을시.군 단위로 넓힘으로써 농어촌전화를 현대화하겠다는 획기적인 계획은 수립되었으나 그것은 우리의 기술로 이룰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그무렵 국내에서는 전기통신연구소가 TDX-1의 개발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언제 어떤 제품이 개발될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그 성능이 입증된 외국의디지털교환기를 도입할 수밖에 없는데, 그때 그 대상으로 선정된 것이 캐나다 회사인 노던 텔리컴의 DMS-10과 미국 회사인 스트롬버그 칼슨의 DMO기종이었다. 체신부는 두 기종을 들여와 전자는 남양주군 구리에, 후자는 고양군원당에 설치하여 1981년말부터 시험운용에 들어갔다. 그런데 막판에 가서 도입기종으로 결정된 것은 스웨덴 회사인 에릭슨의 AXE-10기종이었다. AXE-10은 시험운용이 진행되는 동안 추가 검토의 대상이 되었던 것인데, 이미 1981년에 시외용 전자교환기의 도입 기종으로 채택된 바있어 국내 생산이 용이하고 통신망 구성에 있어 별다른 문제점이 없다는 점이 장점으로 인정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1980년 상공부의 "중화학공업 투자 조정"조치에 따라 농어촌용 전자교환기 전문생산업체로 지정된 동양정밀에게 이 기종을 국산화하여 공급하도록 했다.

농어촌 전화의 광역자동화사업은 당초에는 1988년까지 완성하기로 했으나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개최에 대비하여 1986년으로 계획을 앞당겼다.

그러나 실제로 그 사업이 완성된 것은 1987년 6월말이었다. 그리고 이로써우리나라 전화문제는 대부분 해소되었다.

다시 이응효국장의 말을 들어보자.

"전화현대화의 척도라 할 수 있는 자동화율이 1백%가 되었기 때문에 전화 문제는 다 해결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어요. 1987년말을 기준으로 볼때우리나라 전체전화의 전자화율이 72%인데 군단위 이하인 농어촌전화의 전자 화율은 82%가 되었습니다. 전자화율은 전화선진화의 척도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선진화된 우리나라 전화중에서도 농어촌이 도시보다 더 선진화되었던거죠. 또한 원격교환장치.전송로집선장치 등이 모두 디지털 전송로에 의해 접속되기 때문에 국간전송로 역시 1백% 디지털화됐다고 볼 수 있으므로 이것역시 도시보다 선진화되었던 겁니다. 산간벽지까지 잘 걸리고 잘 들리는 전화가 된 것은 이와 같은 기술혁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