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컴퓨터 파노라마 (3);도입기 (2)

1967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컴퓨터가 도입된 해이다. 우연이었을까. 이해에 기록된 또하나의 역사적 사실이 있다. 바로 우리나라 전자계산소의 효시인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현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전자계산실이 이 해9월14일 발족된 것이다.

KIST전자계산실은 KIST전산개발센터(76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시스템공학센터(84년), KIST시스템공학연구소(SERI.89년) 등으로 명칭을 바꿔 오늘에이르면서 컴퓨터이용기술에 대한 연구가 전무하던 60년대 후반부터 80년대에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컴퓨터 역사에 거대한 획을 긋고 있다.

사회 전반의 예산업무 전산처리, 전화요금 전산화, 대학예비고사 전산처리,경영정보시스템(MIS) 모델연구 등 우리나라가 초창기 컴퓨터 영향권에 들어가는 계기가 되는, 모든 시스템 개발을 KIST전산실이 해냈던 것이다. 또 80년대에는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양대회 전산시스템의 개발과 성공적 운영을 통해 전산화 기반조성 및 정보화 마인드 확산에 결정적인 업적을 남기고있다.

지난 93년 12월11일 서울 한 호텔에서는 한 로과학자의 회갑기념집 증정행사가 조촐하게 치러지고 있었다. 이날 증정된 회갑기념집은 교수.기업체대표등 현재 학계와 정보산업계, 관계에서 활발하게 활동중인 제자격의 60여명이공동 제작한 것으로 30여년 동안 로과학자가 국내 컴퓨터 역사에 남긴 업적을 80여편의 글로 정리해 놓은 것이다.

증정식이 진행되는 동안 특유의 상고머리에 동안인 로과학자의 얼굴에는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머리에는 문득 30여년 전 KIST전자계산실창설에서 오늘날의 SERI가 있기까지의 갖은 풍상들이 한꺼번에 스쳐 지나갔다.

이 노과학자가 바로 기계공학박사 성기수(현 동명정보대학교 총장)다. KIST전산실에에서 SERI에 이르기까지 30여년의 역사는 성기수의 반평생이기도하다.

1967년 KIST전산실의 창설작업은 당시 34세의 공군사관학교 항공역학교관(대위)이었던 성기수가 실장으로 스카우트되면서 완료된다. 이때 성기수는하버드대 역사상 최초로 2년만에 학위를 획득, 국내외 언론이 극찬하던 이른바 잘 나가던 젊은 과학자였다. 그가 영입됨으로써 KIST전산실 창설작업이완료됐다는 표현은 상당히 의미있는 대목이다. 그의 영입 자체가 결과적으로KIST전산실의 무한한 미래를 열어 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KIST전산실 창설은 그가 혼자서 이루어낸 것이다. KIST의 성기수 영입과 초기활동 상황을 통해 KIST전산실 창설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의 KIST영입은 초대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한 김정열의 추천에 의한 것으로전해지고 있다. 당시 KIST소장이던 최형섭(작고)은 컴퓨터에 대한 전문지식이외에첫째, 수학적인 두뇌를 가졌고 둘째, 미국 등 선진국에서 실천적 경험을 쌓은 사람이라는 까다로운 조건을 내건 상태에서 김정열로부터 공군대위 성기수를 추천받았다.

최형섭이 이같은 조건을 내건 것은 정부 차원에서 KIST전산실에 거는 기대가컸기 때문이었다. 당시 정부는 일제의 수탈에 이어 한국전쟁이 남겨준 민족의 가난을 면할 수 있는 최상의 처방으로서 경제건설을 겨냥한 과학기술의발전을 꼽았고 이를 계기로 66년2월 미국의 협조 아래 KIST를 발족시킨다.

이어서 컴퓨터 활용기술에 대한 연구가 KIST 핵심 연구분야 가운데 하나로부각되면서 전산실 창설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고 최형섭은 이같은 중대성때문에 초대 전산실 책임자 영입 문제에 무척 고민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성기수 자신도 초대 KIST전산실장 자리가 온 국민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곳이라는 사실을 직감, 서강대와 캐나다 웨스턴 온타리오대 교수직 등을 포기하는 것으로써 최박사의 배려에 답하게 된다.

67년12월 전산실장에 정식 취임한 성기수는 KIST전산실의 진로를 정하기위해 곧바로 미바텔연구소에서 파견된 전문가들과 함께 컴퓨터관련 수요조사와컴퓨터기종 선정작업를 벌이게 된다.

바텔연구소는 컴퓨터기종 선정을 위한 벤치마크 테스트와 KIST운영의 전반에대한 것을 결정하는 KIST 자문기관이자 KIST 설립의 모델 연구기관이기도했다. 이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토론이 있게 되는데 바텔측이 KIST의 컴퓨터활용분야를 과학기술로 제한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이에 대해 성기수는 사회 모든 분야를 활용대상으로 해야 한다고 팽팽하게맞섰고 결국은 바텔측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KIST 출신들은 이를 두고 오늘날 우리나라 정보산업의 방향이 복잡한 변수들로 구성된 수학적 모델로 자리잡히게되는 분기점이 됐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KIST전산실은 마침내 69년9월 미컨트롤데이터사(CDC)로부터 숙원이었던 "CDC-3300"초대형 컴퓨터를 월 1만6천8백50달러씩의 임대료를 지불키로 하고첫컴퓨터로 도입하게 된다. 이때 우리나라 대졸 초임은 3만원(당시 환율로 81달러)이었다.

"CDC-3300"를 도입한 KIST전산실은 우리나라 컴퓨터역사상 공식적으로 11번째의 컴퓨터 도입기관(기업)으로 기록되고 있다. "CDC-3300"는 당시로선가장 강력한 성능을 갖는 기계로 평가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성기수는 이컴퓨터가 도입되던 당시 거의 매일 TV와 라디오방송에 불려다녔으며 1969년말처음으로 대학예비고사의 채점을 광학카드판독기(OMR)식으로 처리해 냄으로써 이 컴퓨터의 인기는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이때 "CDC-3300"는 고작 32KW(Kilo Word)의 기본메모리와 중앙처리장치(CPU)연산속도도 1플롭스(FLOPS)에 불과한 데다 KIST전산실 요원들조차이 기계를 믿지 못하는 사건이 있었다. 당시 대학예비고사 채점을 담당했던최덕규(고등기술연구원)는 시험지 답안 처리 오류를 막기 위해 여대생 3백명을 3일 동안 강당에 연금한 채 다른 곳에 답안을 옮겨 쓰는(이기)작업을시켰다고 증언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교차검증을 위해 상고생이 주판으로합산을 하고 체크된 에러를 확인하느라 산더미 같은 시험지를 뒤지곤 했다고회고하고 있다.

이로부터 20여년 뒤의 일이지만 KIST전산실은 88년 마침내 국내에서 처음으로 슈퍼컴퓨터 "크레이2 S"를 도입하게 되는데 이 기종의 성능은 기본메모리가 1백28MW, CPU연산속도는 무려 20억 플롭스나 됐다. 도입한 컴퓨터의 CPU연산속도로만 본다면 KIST 전산실의 컴퓨팅파워나 영향력은 20년만에 무려20억배로 확대되는 장족의 발전을 꾀하게된 셈이다.

다시 KIST전산실이 창설되던 초창기로 화제를 돌려보자. 68년부터 성기수와함께 81년까지 이곳에서 재직한 안문석(현 고려대 교수)은 KIST전산실의초창기를 다음과 같이 3기로 나눠 설명하고 있다.

*제1기:YMCA시기(1967~1968)

이때는 KIST전산실이 창설되던 당시로서 현재의 홍릉단지로 입주하기 전종로5가의 YMCA빌딩 5층을 임시 사무실로 사용하던 시기이다. 당시 공사 교관, 한국경제개발협회 조사역, 서울대 경영대학원 및 행정대학원 등에 출강하던 성기수는 바텔연구소와 공동연구를 수행, KIST전산실 설치 타당성 보고서를 작성한다.

성기수가 이때 잠시 적을 뒀던 한국경제개발협회는 자유당 시절 부흥부장관을 지낸 송인상이 경영하던 일종의 경제조사연구소였다. 이곳에서 성기수는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계량부문을 담당했으며 이때 이명재(현 부산대교수).이승윤(작고.전아시아개발은행이사).안문석 등 KIST전산실 초기 3인방을 만난다.

"CDC-3300"가 도입되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정식 컴퓨터는 없었지만 "IBM 029"(카드천공기)와 "IBM 059"(카드검공기) 등 카드천공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제2기:컴퓨터 설치 및 요원선발 시기(1968~1970)

YMCA빌딩에서 현 홍릉단지로 이사를 했으며 본격적인 전산실 요원을 선발하던 시기이다. 이때 최덕규.김길수(전 삼도데이타시스템 사장).한윤경(현경원대교수) 등이 2기 멤머로 KIST전산실에 가세했다.

이때 컨트롤데이터사(CDC)로부터 "CDC-3300"가 도입돼 설치됐고 KIST전산실요원들은 한국전력에 재직중인 송길영(현 고려대교수)로부터 포트란 프로그래밍을, 컨트롤데이터코리아(CDK)의 이덕순(전 삼보소프트웨어 사장)으로부터는 운용체계를 각각 배웠다.

당시 바텔연구소의 공동연구 결과를 토대로 컴퓨터 기종이 "CDC-3300"로결정되면서 이의 도입을 놓고 성기수실장과 청와대 과학담당비서관 정운수와갈등이 표면화됐던 일은 지금도 가끔씩 회자되는 얘기다. 이때 정운수는 다른 기종을 염두에 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이 때문에 도입 예산규모가하루 아침에 임차 수준으로 바뀌게 됐다는 것이다.

*제3기:교육반 설치 및 OJT도입 시기(1970~1971)

컴퓨터를 갓 설치한 KIST전산실의 운영방침은 "컴퓨터가 어렵다는 사고를깨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일반인을 대상으로 어셈블리 프로그래밍 교육반수강생을 공모했고 수료자 가운데 유능한 이를 교육반 강사로 충원하기도 했다. 혹은 전산실내 프로그램 개발보조원으로 채용하기도 했다. 이것이 OJT(Onthe Job Training)제도로서 초창기 전산실요원 가운데는 여기서 특채된 출신들이 상당수에 이르렀다. 대표적인 이가 김봉일(현 한국통신 소프트웨어연구소장)이었다.

초창기부터 KIST전산실의 교육반과 OJT를 거쳐 나간 사람들은 현재까지 1만여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는 KIST전산실 재직경험자를 포함, 현직에 있는대학교수만 50여명이며 연구원재직중 신기술 개발을 통해 창업한 회사가 15개나 되고 있다. 한 조사통계에 따르면 KIST전자계산실에서 배출한 인력이한때 연구원, 기업 중견간부 및 핵심 소프트웨어 개발인력 등 우리나라 전체컴퓨터 고급인력의 11%에 이른 적도 있었다.

KIST전산실의 교육사업은 지금도 시스템공학연구소 강남분소에서 이어지고있다.

<서현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