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고선명(HD)TV 지상파 방송과 유선(케이블) 방송의 전송규격제정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우리나라가 가장 먼저 실시할 예정인 디지털 HDTV 위성방송의 전송규격은 유럽연합(EU)이 채택한 QPSK(Quadrature Phase Shift Keying)를 표준으로 삼고 있지만, 지상파와 케이블 방송쪽에선 아직 미국과 EU규격을 놓고 규격제정 참여업체간에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가장 먼저 실시하게 될 디지털 위성방송은 미국에서도 민간업자들이 중심이 돼 지역별로 실시되고 있으나 통일된 규격을 내놓지는 않고있는 데 비해 EU는 지난 94년말에 표준화작업을 완성해 지역내 디지털방송을하고자 하는 사업자들을 강제규정으로 통일시겼다. EU측의 표준규격은현재 SD(Standard Definition)급 디지털 TV만을 위한 규격이지만 여기에다 비트율이나 대역폭 등을 늘리기만 하면 HD(High Definition)급 디지털 TV, 즉 HDTV 규격도 쉽게 도출할 수 있어서 사실상 HDTV 표준규격이 되는 셈이다.
이에 따라 디지털 위성방송의 전송규격쪽에서는 HDTV 규격제정에 참여하고 있는 전자업체들이 별다른 이견을 보이지 않고 있으나, 지상파 방송과케이블 방송의 전송규격에 대해선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다. HDTV를개발.생산하게 될 전자업체들은 전송방식에 따라 수상기의 기술개발과 시장경쟁 등에 상당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한 목소리를 냈던 전자업계의 의견이 갈라지기 시작한 결정적인계기는 LG전자의 미제니스사 인수다. 지난 90년부터 94년까지 국책개발과제로 HDTV수상기의 국산화를 추진할 때만 해도 미국시장으로의 수출을겨냥해 미그랜드얼라이언스(GA)시스템에 부합할 수 있도록 했고, 수상기에이어 현재 국책개발과제로 전자업체들이 참여하고 있는 HDTV ASIC개발도 GA시스템 수상기에 필요한 부품개발에 주력하는 등 미국규격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미국연방통신위원회(FCC)에선 지상방송에 HDTV를 도입할 목적으로지난 87년부터 차세대 TV(Advanced TV) 방송방식의 규격화를 검토하면서이를 본격화하기 위해 93년 5월에 제각각의 목소리를 냈던 주요 4개 그룹을하나로 묶는 대연합(GA)의 결성을 발표했으며, 이듬해 제니스사가 개발한8-VSB방식을 GA시스템의 변조규격으로 채택했다. GA에는 제니스를비롯해 제너럴인스트루먼츠(GI).AT&T.톰슨.필립스.데이비드사노프연구소(DSRC).MIT대학 등 7개 회사로 구성돼 있는데, GA가 제니스와 GI가 독자적으로 개발해 제안한 전송수신시스템을 시험한 후 제니스쪽에 손을들어준 것이다.
따라서 LG전자가 제니스를 인수함으로써 손쉽게 미국규격의 HDTV기술을 확보할 수 있게 됐으며 HDTV수상기를 같이 개발한 다른 업체들은상대적으로 불리한 입장에 놓일 수밖에 없다는 불안감에서 유럽규격쪽으로선회한 것이다. 특히 삼성전자와 대우전자는 지금도 컬러TV시장에서 LG전자에 한치앞도 양보하지 않는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데, 시장도 형성되기 전부터 LG전자에 기득권을 내줄 수 없다는 게 미국규격 반대의 속사정이다.
EU측 전송규격이 아직 필드테스트를 거쳐 증명되지는 않았지만 미국 VSB변조방식에 비해 주파수 효율성이나 이동체 수신 등에서 유리할 뿐만 아니라, 특히 산이 많은 우리나라의 HDTV방송 전송규격으로 더 적합하다는점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업체들이 그동안 공동개발해온 HDTV수상기와 부품 등이 미GA규격에 맞춰져 있어 EU규격이 채택될 경우에는 당장 HDTV의 국산화 개발계획을 수정해야 한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이윤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