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컴퓨터 파노라마 (6);한글프린터 개발과 OCR 도입

적응기 (1)

외국에서 컴퓨터를 도입해 오는 것이 급선무였던 60년대를 지나온 우리나라컴퓨터 산업은 7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적응기를 맞게 된다. 70년대를연 것이 바로 컴퓨터로 한글을 출력할 수 있는 라인프린터의 개발과 대량의데이터처리가 가능한 OCR/OMR(Optical Charcter/Mark Reader:광학카드판독기)의 활용이었다.

이 가운데 70년말과 71년초를 전후해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와 한국IBM등의 한글 라인프린터의 개발은 컴퓨터 활용의 토착화를 알리는 최초의 사건이었다. 이어 71년 체신부와 문교부가 각각 전신전화요금 및 대학예비고사채점 전산화용으로 OCR을 도입한 것은 컴퓨터 활용면에서 대량의 데이터처리와업무의 신속성.정확성.경제성 등을 함께 고려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주는서곡이었다.

지금은 별로 쓰이지 않는 라인프린터는 한 글자씩 인쇄하는 도트매트릭스프린터와 달리 행(line)단위로 문서를 인쇄할 수 있어 대량의 정보를 고속으로출력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한글 라인프린터의 개발은 원래 한국IBM이 68년 처음 착수했다. 그러나 완성은 이보다 1년 늦게 개발에 착수했던 KIST 전자계산실이 먼저 했다. KIST전자계산실은 70년 11월, 한국IBM은 71년 3월 각각 독자적인 한글라인프린터개발을 완료한 것이다.

한글 라인프린터가 개발되면서 비로소 우리나라는 컴퓨터 상에서 한글을처리, 이를 곧바로 프린터로 인쇄할 수 있는 시대를 열었다. 당시까지 우리나라의 컴퓨터 도입기관들은 컴퓨터에서 처리된 문서를 영문 상태로 출력한다음 이를 한글로 번역, 인쇄소에서 재편집하는 이중작업을 벌여야 했다. 한글라인프린터의 개발요구는 70년대 들어 각 기관이나 기업의 OCR도입, 즉 데이터의 대량처리 시스템 도입이 예상되면서 필연적으로 제기됐다. KIST가 발표한 한글 라인프린터는 1분당 4만8백자(136컬럼×3백행)를 인쇄할수 있는고속제품이었다. 개발작업은 KIST전자계산실과 미국 컨트롤데이터사(CDC)에근무하는 한미양국 엔지니어들의 공동 프로젝트로 진행됐다. CDC엔지니어들이 한글 라인프린터 개발에 참여한 것은 당시 KIST전자계산실에 설치돼 있던컴퓨터 기종이 CDC의 "CDC 3300"(69년 도입)이었기 때문이었다.

한글의 인쇄는 글자들이 연속적으로 찍혀 나오는 영문알파벳 처리와 달리컴퓨터상에서 자음과 모음을 초성.중성.종성 형태로 구분해 조합해줘야 하는복잡한 처리과정을 거쳐야 한다.

KIST전산실 성기수실장이 직접 수행한 작업은 한글의 자모 형태를 배열에따라 11종으로 나누고 이를 컴퓨터가 처리하도록 프로그램을 짜는 일이었다.

이 프로그램의 특성은 2벌식 표준자판에서 예를들어 "Aa A"처럼 풀어쓰기 형태로 글자를 입력하면 "한"과 같이 모아쓰기 형태로 찍혀 나온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프린터에서 별도의 제어장치를 새로 개발할 필요가 없었다. 당시 KIST전자계산실팀은 CDC에서 개발한 영문라인프린터에서 영문 체인을 한글 체인으로 바꾸는 것만으로 이를 해결할 수 있었다. KIST측은 이 한글 라인프린터 개발에 모두 2백만원의 자금을 소요했다.

4개월 뒤인 71년 3월 한국IBM도 서독IBM 및 스웨덴IBM 등 3개국 현지법인의공동프로젝트로 IBM 컴퓨터용 한글 라인프린터를 개발해 냈다. 당시 한국IBM 전자계산실장 김성중(현 기흥정보시스템 대표)의 주도로 개발된 이 프린터는 2벌식의 KIST 것과 달리 4벌식이었으며 인쇄속도도 1분당 2만6천9백여자로 훨씬 느렸다.

아무튼 한글 라인프린터의 개발로 인해 굵직굵직한 정부 전산프로젝트의발주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KIST가 CDC와 함께 한글 라인프린터의개발을 성공으로 이끈 직후 착수한 사업이 바로 71년 체신부의 서울시내 전신전화요금 업무 전산화와 문교부의 대학예비고사 채점 전산화였다. 사실 이두가지 업무의 전산화는 한글 라인프린터가 개발됐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체신부는 70년 6월 1백50만원의 예산을 들여 체신부내 EDPS(전자식 데이터처리 시스템)기본계획을 수립한 데 이어 71년 9월까지 서울시내의 전신전화요금을 EDPS화했다. 전신전화요금의 EDPS화는 구체적으로 서울시내에서만 매일수만매씩 쏟아지는 시외 및 국제전신전화발신증 처리를 전산화하는 것이었다.

이때 체신부는 이 프로젝트를 수행한 KIST전산실 측의 자문을 받아들여 내외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전신전화발신증 처리용OCR시스템 "CDC OCR 936"를 도입했다.

시외 및 국제 전신전화 발신증은 내용상으로는 별게 아니어서 입력자료를읽어 그대로 자기테이프에 수록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매일 수만매씩쌓이는 것을 PCS(천공카드시스템)로 처리하는 것은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KIST측은 매일 1천3백대 분의 PCS로 처리해야 할 시외 및 국제 전신전화발신증을 OCR로 처리케 함으로써 오늘날 전화 대량보급시대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해 줬다.

전신전화요금 전산화는 KIST전산실이 주도를 했고 CDC 등의 기술지원이 따랐다. 이때 체신부에서는 박종현(현 한국통신기술 상임감사).이영남(현 농수산물 도매시장관리공사 사장) 등이 실무책임자로 나섰고 KIST측에서는 김우영(현 하이퍼테크 대표).권순덕(현 한맥소프트웨어 대표).황대규(도미).유락균(작고) 등이, CDC에서는 이지상(현 한국소프트웨어써비스 대표) 등이 참여했다.

전신전화요금 전산화 추진은 당시로서 자금소요가 많고 성공 가능성도 많지않아 체신부로서는 대단한 모험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사업이 훗날체신부가 우리나라 컴퓨터산업 정책의 주도권을 잡는 계기를 마련해줄 줄은아무도 몰랐다.

체신부는 서울시내 전신전화요금 전산화의 성공을 계기로 박종현 등을 주축으로 74년 체신부 전자계산소를 발족시키고 미스페리사로부터 대형컴퓨터"유니백1106"를 도입하면서 가입자 전신전화요금 전산화 등을 진행시켜 나간다.

70년대초 치렀던 또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바로 71년의 대학예비고사 채점전산화였다. 이 프로젝트 역시 KIST전산실이 맡아 했으며 그 주역들은 안문석(현 고려대교수).김봉일(현 한국통신 소프트웨어연구소장).신동필(전시스템공학센터소장).최영화 (현 KIST부설 정보기술교육센터) 등이었다. 문교부측에서는 최지훈(현 서울대 교수) 등이 참여했다.

71년의 채점전산화는 69년 대학입학 예비고사가 처음 실시되고 난 뒤 2년만의 일이었다. 69년 첫 해는 수작업으로 처리했고 채점결과를 통해 합격자를가리는 정도의 작업에 컴퓨터가 이용됐다.

70년에는 한글 라인프린터 개발 및 OCR 등 관련장비의 도입 전이어서 개인시험지에 직접 채점을 하고 이것을 개인별 종합성적표에 옮겨 적는 일까지가수작업으로 처리됐다. 그런 다음 전체 수험생에 대한 채점집계와 석차부여및 합격자 결정 등은 PCS를 이용해서 IBM 80컬럼 카드에 옮겨 처리하는 수준이었다. 이러한 처리 과정에서 실수와 오차를 없애기 위해 반드시 2회씩 검토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래도 이 작업은 나은 편이었다. 69년 첫 해는 채점이후의 모든 통계 작업은 주산 5단 이상의 상업학교 학생 30여명이 20여일합숙하며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71년부터는 채점에서부터 합격자를 가리고, 각종 통계를 내는 모든과정이 전산화된 것이다. 포트란 언어로 짜여진 응용프로그램과 OCR의 덕택이었다. 당시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최영화는 "예비고사 채점 전산화는 너무 힘든 프로젝트여서 연구원들 사이에서 기피대상 1호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답안지 입력에서 채점.사정에 이르기까지 단 한건의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완벽한 결과를 요구하는 작업이었기 때문이었다.

대학입학 예비고사 채점전산화는 교육행정분야에 대한 컴퓨터 이용이 뗄래야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줬다. 사실 교육행정분야에 컴퓨터가 처음으로 도입된 것은 예비고사 채점전산화보다 1년여 앞서있었던 서울시의 70년도 중학교 무시험 추첨이었다. 예비고사 채점에 비하면극히 간단한 작업이었지만 이것은 컴퓨터를 일반인들 사이에 70년대의 "스타"로 부상시켜주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수동식 은행알 추첨기를 학생들이 직접 돌리는 것에 대한 불편과 잡음을없애기 위해 컴퓨터를 이용하자는 의견은 68년부터 나왔었다. 69년 8월 서울시교육위원회가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학부형 78%가 70년도 입학생부터당장 컴퓨터 추첨방식을 도입하자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서울시 교육위원회는 70년 2월3일 이 프로젝트를 맡았던 당시대한전자공업주식회사의 서울 구로동 소재 전자계산실에서 오경인 교육감이참석한 가운데 남학생 5만5천여명, 여학생 4만3천여명에 대한 컴퓨터 중학교무시험추첨에 들어갔다.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컴퓨터가 학생들에게 학교배정에 필요한 난수기호를 지정해 주는 일이었다. 이 난수기호는 해당 학생의 출신 국민학교.학년.반.번호.남여성별 등 5개의 조건을 입력해서 무작위로 뽑아낸 것이었다.

이날 치러진 컴퓨터 추첨은 이틀 뒤 2월5일 오교육감이 경기여고 강당에서중학교별 기호를 발표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원래 중학교 무시험추첨은 이주용(현 한국전자계산주식회사 회장)이 소장으로 있던 한국전자계산소(현 한국전자계산주식회사)가 제안했던 것으로 당시이주용은 난수기호 지정을 위해 학생의 통학거리.버스노선.IQ분포.성적.신체조건 등의 조건을 입력할 것을 건의했으나 너무 복잡하고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문교부 측에 의해 거절당했다.

중학교 무시험 추첨에 이어 예비고사 채점 및 전신전화요금 전산화는 우리나라 컴퓨터 역사에서 70년대의 창을 활짝 열어주는 시발점이 됐을 뿐 아니라이후 본격화된 보사부.철도청.국방부.농림수산부.법무무 등 정부 부처의행정전산화의 전형이 됐다. 아울러 금융권 및 일반기업의 전산화에도 모범적기틀을 제공해 줬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서현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