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컴퓨터 도입과 정보과학회 탄생
우리나라 대학 가운데 처음으로 컴퓨터를 도입한 곳은 69년1월 서강대였다.
서강대는 미스페리랜드(현 유니시스)가 제작한 "유니백 솔리드스테이트(SS) 80"기종을 당시 자매결연을 맺고 있었던 미미네소타 주립대학으로부터기증받았다.
도입에 앞서 서강대는 경제학박사 김만제(현 포항제철회장)와 물리학박사박병소(현 서강대교수) 등 소장파 교수들을 주축으로 68년11월 국내 처음으로대학부설 전자계산소를 설립하는 등 만만의 준비를 갖췄다. 서강대의 컴퓨터도입 과정이나 부설 전자계산소를 설립하고 운영하는 방식 등은 훗날 다른대학들의 귀감이 됐음은 물론이다.
연세대도 같은 해 10월 당시 박대선총장의 주선으로 미유나이트 포드재단으로부터 또다른 "유니백 SS 80"기종을 기증 받았다. 하지만 이들 "유니백SS 80"는 컴퓨터 세대 구분상 트랜지스터를 사용하는 2세대 기종으로서 모두중고품이었다. 조작할 전문요원도 부족했던 데다 고장까지 잦아 작동시간보다는 멈춰 있는 시간이 훨씬 많았던 용도 폐기직전의 낡은 기계였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스페리랜드의 국내 판매회사였던 한국유니백 관계자들까지도"고물기계"로 낙인찍었을 정도였다. "유니백 SS 80"는 그러나 당시 다른 대학들이 본격적으로 컴퓨터를 도입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서강대가 유니백SS 80"를 도입한 직후 69년 5월 한양대가 3차 대일청구자금으로 일본 후지쯔로부터 "파콤230 10"을 들여왔고 해를 넘기기 직전인 12월말에는 숭실대가 IBM의 "IBM 1130"를 도입했다.
70년 5월에는 서울대가 전자계산소 발족과 함께 문교부 예산으로 IBM의 "IBM 1130"를 도입했다. 이어서 71년 10월과 72년 4월에 중앙대와 동국대가각각 같은 "IBM 1130"기종을 도입했다.
이밖에 70년대 초반 다른 곳보다 앞서 컴퓨터를 도입한 대학들로는 73년2월의 광운공대("IBM 230/15"), 74년9월의 홍익대("CDC 3200") 등을 빼놓을수없다. 이들 대학의 컴퓨터관련 학과들이 지금까지도 대학 입시생들로부터인기가 있는 것은 바로 이같은 사실들과 무관치 않다.
70년을 전후하여 대학들이 컴퓨터 도입을 서두른 것은 컴퓨터에 눈 떠가는사회 전반에 뒤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학생들의 실습교재로는 물론 과학계산등 교수들의 연구분야에도 절대 필요했다. 또 과중해지는 학사행정 전산화에대한 당면과제도 빼놓을 수 없었다. 물론 도도하게 밀려오는 사회 전반의 전산화 물결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인재양성은 더욱 시급한 과제였다.
당시 외국 유학에서 돌아온 젊은 학자들은 우리나라 지도층도 선진국의 정보화 물결과 컴퓨터의 실용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글을 연일 신문이나 잡지.
학회지 등을 통해 설파하고 나섰다. 미국의 "아폴로"계획이 컴퓨터로 진행되고있다는 사실은 좋은 본보기였다. 그러나 당시 대학의 재정은 당장 시급한것도 아닌 컴퓨터를 도입하는데 예산을 낭비(?)할 만큼 풍부하지 못했다. 또도입을 주장하는 교수들 역시 극소수의 소장파에 불과해 불리한 상황이었다.
서강대가 컴퓨터를 도입한 과정을 기록해 놓은 전자계산소(컴퓨터센터)일지를 보면 당시 대학들의 컴퓨터 도입여건이나 전반적인 국내환경이 어떠했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일지는 예컨대 미국에서 컴퓨터를 기증받기는 했지만 막상 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각 부분품들을 연결하고 설치하는 기사가없어 2개월간 아무 작업도 할 수가 없었다고 적고 있다. 결국 일본인 엔지니어마사히토 야마모토를 불러 1개월 만에 설치를 완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어려운 여건을 이겨내며 컴퓨터를 들여온 대학들의 인재양성상황은 컴퓨터를 도입하지 못한 대학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초기 대학에도입된 컴퓨터는 학생 실습용이나 교수 연구용으로서보다는 학사업무와 행정자동화 용도로 더 위력(?)을 발휘했다. 무엇보다도 학생들에게 컴퓨터를가르칠 수 있는 전문가들이 드물었고 체계적 교육을 위한 커리큘럼이나 교재는더더욱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일부 대학에서는 컴퓨터개론 위주의 EDPS 강좌를 교양과목 또는 선택과목으로 개설해 놓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같은 산발적 강좌로는 거센 전산화 물결을 능동적으로 맞이할 고급 인재양성에는 턱없는 일이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과감하게 학생들에게 컴퓨터를 체계적으로 가르치고자 시도한 곳은 숭실대였다. 70년도 신학기부터 이 대학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전자계산학과를 공과대학내에 설치하고 30명의 신입생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대학 컴퓨터교육의 체계적 시발점이었던 것이다.
숭실대에 전자계산학과를 설치하는데 산파역을 맡은 이는 당시 전자공학과교수이자 부설 전자계산소장이었던 김기용(현 홍익대 교수)이었다. 김기용은당시에 69년초 경제기획원이 국내 처음으로 도입했다가 유한양행으로 넘겼던"IBM 1401"을 임시로 빌려 필요한 학사업무를 처리하는 한편, 틈틈히 학생들을 대상으로 공개강좌를 해오던 터였다.
김기용은 숭실대 총장으로 특명을 받아 68년 초부터 전자계산학과 설치를위한 연구조사작업에 나섰다. 이때 김기용이 참조한 것이 바로 미국의 대학들이 채택하고 있던 소위 "커리큘럼69"이었다. "커리큘럼69"을 기준으로 전자계산학과의 교과목들이 정해졌고 69년12월 최신 대형 컴퓨터인 "IBM 1130"이도입됐던 것이다. 김기용은 또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한 교재로 "전자계산학"을 직접 집필, 출간하기도 했다. "전자계산학"은 68년 송길영(현 고려대교수)이 펴낸 "전자계산기 입문"과 함께 당시로서는 몇권 되지 않은 한글판컴퓨터교재였다.
숭실대를 계기로 71년 중앙대가, 72년에는 동국대.광운공대.홍익대 등이잇따라 전자계산학과를 개설하고 신입생 모집에 나섰다. 72년 신학기 때 이들5개 대학의 전산학과 신입생 정원은 숭실대와 홍익대가 각각 50명, 중앙대와광운공대 각각 30명, 동국대가 40명 등 모두 2백명에 이르렀다.
전자계산학과를 설치하지는 않았지만 관련학과에 컴퓨터 부전공 제도를 두고있었던 곳은 서울대 응용수학과, 연세대 응용통계학과, 한양대 전자학과,건국대 전자공학과, 충남대 전자공학과 및 전기공학과 등이었다. 이밖에 서강대 전자공학과, 경희대 이공대학, 명지대 전자공학과, 부산대 공대 등이선택과목 또는 교양과목으로 컴퓨터관련 교과를 개설해 놓고 있었다.
대학원의 경우는 대학의 전자계산학과 설치보다 먼저 관련학과가 개설돼운영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대학원 관련학과의 설치는 68년 성균관대 경영대학원의 전자자료처리학과가 효시였다. 이 학과를 설치한 주역은 우리나라경영학박사 제1호로 알려진 서남원(현 고려대 교수). 고려대에 재직중이던서남원은 성균관대로 옮기면서 당시 권오익총장과 컴퓨터를 도입한다는 것을전제로 경영대학원에 전자자료처리학과를 설치하고 관련 과목을 개설했다.
고급 경영정보시스템(MIS)관리자 양성이 학과 설치의 첫째 목적이었다.
서남원은 성균관대에 컴퓨터가 도입되기까지 육군의 "유니백 9300"와 한국무역협회의 "NCR C 100" 등을 빌려 학생들의 실습을 도왔다. 이 당시 성균관대 전자자료처리학과를 수료한 이들이 조이남(현 금융결제원 상무).김병각(현 한국디지탈 전무).유경희.로연후(현 대검전산담당관) 등이다.
서남원은 이후 71년 고려대 경영대학원으로 복귀하고 성균관대 전자자료처리학과와 유사한 전자정보처리전공 과정을 개설함으로써 국내 대학원 전산관련학과 설치 1,2호의 주역이라는 진기록을 갖고 있다. 그가 고려대로 복귀한것은 성균관대 권총장이 컴퓨터도입 약속을 2년이 넘도록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70년대를 전후한 이 시기에 대학에서 컴퓨터관련 인재양성에 나섰던 교수들로는 숭실대 의 김기용(현 홍익대 교수)과 송후봉(현 숭실대 부총장), 중앙대의 이태원(현 고려대교수), 동국대의 안사명, 서울대의 김영택과 안수길(현 명예교수), 연세대의 한만춘과 박규태, 고려대의 서남원과 송길영, 광운공대의 김경태(작고), 한양대의 김경기(작고), 한국과학원(현 KAIST)의 박찬모(현 포항공대교수)와 조정완 등을 꼽을 수 있다.
한편 72년에는 숭실대 등 대학에 전자계산학과를 설치하고 있던 5개 대학전산소장이 발기인이 돼 컴퓨터 분야에서는 국내 처음으로 학회명칭을 사용한전자계산학회를 발족시켰다. 학회의 발족은 컴퓨터가 대학에서 학문의 소재로 정착됨에 따라 이에 대한 연구기반의 조성과 사회적 협력의 필요성에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전자계산학회는 과기처로부터 승인을 받지 못한 채 표류하다 73년3월1일 한국과학기술연구소(현 KIST) 등 연구소와 은행.기업 등 업계의 엔지니어 출신 인사들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한국정보과학회라는 이름으로 화려하게 재탄생된다.
KIST소장 한상준(현 한양대 명예총장)을 회장, 서남원과 서울대 교수 이우한등을 부회장으로 해 발족된 한국정보과학회는 오늘날 수 천명의 회원을 가진국내 최대 규모의 학회로 발전했으며 정보통신분야 산학협동의 산실로 통하고 있다.
<서현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