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단 전자계산본부 출범과 최초의 온라인
컴퓨터 도입과 함께 몰아닥친 전산화의 물결은 금융기관에도 예외일 수는없었다. 60년대말의 전산화 물결이 정부기관에 집중됐다면 70년대 초반의 전산화물결은 금융기관 특히 은행 쪽으로 모아졌다.
70년대 은행 전산화 대상업무는 크게 두가지 였다. 첫째는 한일은행.상업은행 등 시중은행이 추진했던 은행 사무자동화, 두번째는 사무자동화 다음단계로 본점과 지점간 고객의 입출금처리 및 조회업무를 즉시 자동화하는 온라인뱅킹 등이다.
물론 60년대 중반부터 한국은행.기업은행 등 국책은행들은 카드천공시스템(PCS)을 도입, 은행 고유업무와는 거리가 있는 조사통계업무를 처리해 오고있었다. 그러나 PCS는 일반은행들이 60년대 말부터 컴퓨터를 직접 도입하는계획을 수립하는 계기가 됐다.
은행들이 고유업무에 대한 전산화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60년대 중반이후부터이다. 그러나 컴퓨터를 전혀 보유하고 있지 못했던 은행들은 전산관련 업무를 자체 처리할 수 없어 전전긍긍했다. 이때 등장한 우리나라 최초의컴퓨터 용역기관이 바로 한국전자계산소(현 한국전자계산주식회사)이다.
한국전자계산소는 67년 설립과 함께 한국은행.한일은행 등으로부터 정기적금및 환대사 업무 용역에 나서게 된다.
한국전자계산소의 용역업무를 계기로 조사통계업무의 PCS처리에 머물던 은행전산화는 은행업무 전산화는 환경 면에서 큰 변화를 맞기 시작했다. 그 첫신호로 왼환은행이 67년 설립과 함께 기획조사부내에 사무개선과를 신설하고미국 NCR사로부터 "NCR센추리-100"을 발주하게 된다. 뒤이어 상업은행이 68년 컴퓨터도입 및 활용을 위한 조직으로 사무부를 신설하고 한국유니백을 통해 미국의 스페리랜드사(현 유니시스)로부터 대형컴퓨터 "유니백9400"도입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상업은행의 컴퓨터 도입계획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상업은행이 도입하려 했던 "유니백9400"은 69년10월 창설된 금융기관 사무기계화개발위원회 산하 금융단 전자계산본부(KBCC)가 승계 인수했다.
금융기관 사무기계화개발위원회는 일종의 은행사무자동화 공동추진위원회같은 것이었다. 이 위원회의 실무 상설기구가 바로 KBCC였다. 80년대 후반비로소 눈뜨기 시작한 은행간 인터뱅킹 즉 금융전산망 추진의 징검다리를 놓은것도 바로 이 KBCC이다. 여기서 잠깐 KBCC의 탄생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60년대 말은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추진과 함께 경제규모가 팽창하기시작했고 그 결과로 금융부문의 양적 성장을 가져오던 시기였다. 여수신업무량.점포수.은행원 등의 급속한 증가가 이뤄어졌던 것이다. 새로운 은행 신설도잇따랐는데 이때 설립된 은행들이 외환은행.주택은행.신탁은행 등이다.
이에 따라 은행들은 은행간 경쟁체제를 의식하게 됐고 인건비 절감과 사무개선, 즉 생상성 향상을 위해 저마다 컴퓨터도입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은행들의 독자적 전산화 움직임은 은행의 대중화와 경쟁체제의 도입이라는 긍정적 측면과 함께 부정적 우려감도 적지 않았다. 은행감독원은컴퓨터를 먼저 도입했던 기관의 시행착오 사례를 들어 은행의 독자적인 컴퓨터도입과 운영에 난색을 표명하고 나섰다. 컴퓨터 도입에 따른 비용조달과인력확보도 먼저 선결해야 할 과제였다.
이때 주무부처인 재무부 이재국장이던 장덕진(현 대륙개발 회장)이 마련한것이 "적 금융기관 EDPS화 통합운영방안"이라는 것이었다. 골자는 막대한 컴퓨터 도입비 절감과 인력확보, 시행착오 예방 등을 위해 모든 금융기관이 함께 이용할 수 있는 컴퓨터 공동이용센터를 마련하자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당시 13개 은행이 공동출자, 금융기관 사무기계개발위원회를 창설했고 그산하기관으로 KBCC를 두게 됐던 것이다.
KBCC는 69년10월 상업은행이 발주했던 "유니백9400"을 인수하면서 정식 업무를 시작했다. "유니백9400"과 함께 상업은행이 독자적으로 확보했던 인력및노하우까지 그대로 승계한 KBCC는 70년대 중반까지 국내 적 산업분야를 걸쳐최초의 컴퓨터공동이용센터로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 가운데서도컴퓨터 도입 비용과 위험부담의 공동부담, 각종 표준화작업과 시스템 개발,은행간 공동업무 개발 등의 성과는 70년대 적응기로 접어든 우리나라 컴퓨터역사에 하나의 획을 귿는 중요한 업적이 됐다.
KBCC는 각 은행의 급여업무와 적금처리업무를 수탁처리하는 일과 함께 당시로서는 절대 부족했던 전산요원 양성과 조사업무에도 힘을 썼다. "언더스탠딩 컴퓨터"나 "코볼언어" 등 서적들을 직접 펴냈고 일본과 미국 금융기관의컴퓨터 도입사례 연구를 통해 "은행업무의 EDPS화의 효율적 방안" 등과 같은대정부 보고서들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러나 KBCC의 이같은 노력에도 불구 은행들의 컴퓨터 공동이용은 한계에부닥칠 수밖에 없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 가운데 가장 큰 이유는은행업무의 폭주에 따른 컴퓨터 용량의 한계 때문이었다.
컴퓨터 용량의 한계는 사실 KBCC의 발족부터 에견돼 오던 일이었다. 제 아무리 큰 용량이라 하더라도 13개 회원은행의 용역을 제 시간에 처리해 준다는것은 무리였다. 매달 하순부터 다음달 초순경에 걸쳐 정기적으로 발생하는업무집중현상도 피할 수 없는 것이었고 업무과중으로 하드웨어 고장이라도일으키는 날이면 고쳐질 때까지 업무가 중단돼야 했던 것이다.
한계에 부닥친 두번째 이유는 은행업무의 성격상 용역 처리할 수 있는 것과그렇지 못한 것이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KBCC가 처리한업무는 단순 집계업무에 불과했다. 일본에서 이미 60년대 말부터 보편화되기시작한 온라인 뱅킹이라든가 과목별 온라인과 같은 본격적인 은행업무 처리는 KBCC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7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은행들은 나름대로 경영여건이 호전되기 시작했고 자체 시스템을 가동하지 않고는 처리할 수 없을 만큼 업무가 폭주하기시작했다. 이와 때를 같이해서 정부는 75년1월 금융업무 전산화에 대한 정부방침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주요 내용은 금융기관전산화 종합육성계획수립,지로(GIRO) 및 어음교환업무의 기계화 개발(시스템개발), 금융기관 사무기계화개발위원회의 은행에 대한 컴퓨터 도입 심의 등이었다. 이 방침 가운데 눈여겨 볼 대목이 바로 금융기관 사무기계화개발위원회의 컴퓨터 도입심의이다. 결국 금융기관 마다의 특성과 업무폭주로 인해 정부는 은행의 자체 컴퓨터 도입을 권장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같은 정부방침이 나온 직후인 75년 4월 농협중앙회가 처음으로 "유니백9480"을 도입했고 같은 해 11월에는 상업은행이 후지쓰로부터 "파콤230-48"을들여오게 됐다. 이어 76년에 국민은행과 서울신탁은행이, 77년에 조흥은행.
제일은행.한일은행.한국은행 등이 잇따라 컴퓨터시스템을 자체 비용으로들여오게 됨으로써 은행자체 전산화시대가 열렸다.
은행 자체 전산화시대가 열림에 따라 KBCC의 위상이나 역할도 재정립할 필요성이 요구됐다. 결국 KBCC는 사단법인 금융기관 전자계산소로 바뀌면서 융업무전반에 걸친 종합전산화 계획을 수립, 관리하는 기관으로 자리잡게 된다.
금융기관전자계산소는 77년6월 은행지로관리소로 명칭이 바뀌었고 다시 86년6월 어음교환관리소와 통합, 금융결제관리원으로 재탄생되면서 금융전산망사업을 총괄하게 된다.
한편 70년대 초반 주요 은행들이 금융단전자계산본부(KBCC)를 통해 컴퓨터의공동이용에 만족하고 있을 즈음 외환은행은 KBCC에 가입하지 않고 처음으로부터 홀로서기를 시도하고 나섰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외환은행은 70년 1월 "NCR센추리-100"의 도입을 완료하고 독자적인 컴퓨터 운영에 들어갔던 것이다. 68년말에 컴퓨터 도입계획을세웠던 상업은행과 달리 외환은행이 정부의 권고를 뿌리치면서까지 KBCC에가입하지 않았던 것은 은행설립(67년1월) 5~6개월 전부터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해온데 따른 자신감에서였다.
외환은행의 꿈은 야무진 것이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이미 본점과 지점간온라인뱅킹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외환은행은 바로 국내에서 첫 온라인뱅킹의실현이라는 목표를 세워놓고 있었다. 이 목표 달성을 위헤 컴퓨터 도입 이전인 68년부터 NCR 한국대리점이었던 동아무역(현 동아컴퓨터)을 통해 전산요원 교육에 나섰다. 또 전산요원들을 수차에 걸쳐 일본에 파견, 온라인뱅킹시스템 교육을 받도록 했다.
외환은행은 마침내 72년11월28일 미국에서 새로 도입한 "NCR센추리-200"및온라인용 패키지와 일본NCR의 기술지원에 힘입어 국내 처음으로 서울과 부산간 온라인 개통에 성공하게 된다. 서울본점의 호스트를 전화선을 통해 부산지점의 "NCR 42"터미널과 연결한 것이다. 을지로전화국-동대문시외전화국-대전중계소-부산시외전화국 등 무려 9군데의 중계국과 중계소를 통한 연결이었다. 바로 이같은 어려운 환경 때문에 일본NCR의 기술진들이 난색을 표명했음은 물론이다.
개통 후 외환은행은 보통예금과 종합가계예금의 송금 및 결제업무를 온라인을 통해 수행했고 대상지역도 인천.대구.마산 등으로 넓혀갔다. 외환은행의노력에 대한 결실은 이후 74년 대한항공의 좌석예매온라인 시스템 가동과75년 이후 본격화된 타은행 온라인뱅킹시스템 도입과정에 교과서가 됐다.
외환은행의 온라인 가동은 당시 행장이던 김우근(현 한국산업개발투자 고문)의 집념에서였다. 김우근의 애당초 목표는 서울과 인천지점간의 온라인뱅킹이었다. 서울 부산간 온라인뱅킹시스템 개통 후 김우근은 한 인터뷰에서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진정한 1일 생활권 실현을 꿈꾸었는데 71년 미국출장중 LA와 뉴욕간 송금및 결제가 온라인으로 처리되는 것을 보고 서울-인천간에서 서울-부산간으로바꿔 결심하게 됐다."
금융권에서는 지금도 진정한 1일 생활권은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에서보다는서울부산간 외환은행의 온라인뱅킹 개통에서 실현됐다고 믿어 의심치 않고있다.
<서현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