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의 형성(상)-미니컴퓨터 3총사의 부상
60년대말부터 70년대말까지의 10여년 사이 우리나라의 주요 기관과 기업들이도입한 컴퓨터 대수는 4백27대에 이르고 있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70년대중반부터 중대형급 컴퓨터의 도입비율이 감소하는 대신 미니컴퓨터의 도입이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와함께 규모가 작은 공공기관이나중견기업들의 도입비율도 크게 늘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60년대말까지 우리나라에 도입된 10여종의 컴퓨터은 IBM의 "S/360".
일본 후지쯔 신기제작소의 "파콤".컨트롤데이터의 "CDC".스페리랜드의 "유니백" 등 고가의 중대형 컴퓨터들이 주류를 이뤘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같은현상은 분명하게 제동이 걸린다. 바로 데이터제너럴(DG)의 "노바(NOVA)".
디지털이퀴프먼트(DEC)의 "PDP".왕래버토리즈의 "왕(WANG)".NCR의 "센추리(Century)".버로스(Burroughs)의 "버로스" 등 미국회사들의 미니컴퓨터 기종들이 급부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 미니컴퓨터 기종은 세계적으로 반도체기술의 급진전에 따라 중대형급에비해 도입가격이 최고 10분의 1까지 저렴하면서도 성능차이는 그다지 크지않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예컨데 72년 KIST 방식기기 연구실이 도입한 3대의 "노바01/1200"기종은 주기억용량이 각각 16.32.48kB였는데 구입비용은 합쳐서 6만달러에 불과했다. 4년전 68년 육군 경리단에 도입됐던 스페리랜드의8kB의 "유니백9300"이 20만달러, 67년에 도입됐던 "IBM 1401"은 월 사용료(임대료)만 9천달러였던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72년부터 75년까지 "노바" 등 미니컴퓨터를 도입한 곳을 보면 KIST 방직기기연구실.행양개발연구소.해군본부.동국제강.한영공업(현 효성중공업).강원산업.목포상고.동양시멘트.삼화고무.국제전기 등 30여곳 40대에 이른다. 이기간동안 국내에 도입된 컴퓨터 전체 93대의 40%가 넘는 비율이다. 컴퓨터가정부 부처와 규모가 큰 공공기관 및 대기업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보여주는 것이었다.
미니컴퓨터의 부상은 컴퓨터에 대한 활용의 폭이 그만큼 넓어질 수 있다는점에서 사용자층 뿐만 아니라 컴퓨터업계에도 새로운 기운을 불러왔다. 60년대말까지 우리나라 컴퓨터업계는 사실 업계라고 일컬어질 만한 규모였거나수준은 결코 못되었다. 이때까지 나타난 컴퓨터 관련 기업은 모두 합쳐 10개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컴퓨터업체로서 명함을 내밀 수 있었던 곳은 한국IBM.한국유니백.컨트롤데이타코리아(CDK) 등 기종 공급회사와 공공기관 형태의 한국전자계산소(현 주식회사 한국전자계산).KIST 전자계산실(현 시스템공학연구소).서울컴퓨터센터(현 서울정보처리학원) 등 용역서비스 기관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72년 5월 인터내셔널데이터코퍼레이션(IDC)을 필두로 한국뉴콤.인터내셔널데이터스템코퍼레이션(IDsC).동양시스템산업(OSI).MC인터내셔널.금호실업 전자전기사업부.동양전산기술 등 미니컴퓨터 전문 공급회사가 잇따라출범하면서 컴퓨터 분야는 독자적인 산업으로서 그 영역을 확보하려는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또 컴퓨터를 도입하려는 기관이나 기업들이 급증하면서시장개념이 생겨나고 공급회사들의 제품경쟁이 본격화될 기미도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미니컴퓨터 공급회사들의 등장으로 가장 긴장한 곳은 기존의 중대형 컴퓨터공급회사들이었다. 미니컴퓨터 기종의 이른바 가격대비 성능의 우수성 입증으로 중대형 컴퓨터 공급회사들의 대응책 마련이 본격화됐다.
한국IBM의 경우 69년말 38명에 불과했던 직원이 75년말에는 1백20명으로늘고 같은 기간동안 자본금도 1억9천만원에서 20억8천만원으로 증가했다. 스페리랜드는 한미 합작법인이던 한국유니백의 조직을 인수, 71년 현지법인 스페리랜드코리아(현 한국유니시스)를 출범시켰다. 또 일본에서 제품을 직접공급해오던 일본의 후지쯔 신기제작소는 74년 화콤(파콤)코리아(현 한국후지쯔)를 설립했고 중형급 NCR기종을 공급해오던 동아무역 역시 본격적인 영업활동을 위해 75년 동아컴퓨터를 별도 출범시켰던 것이다.
70년대 미니컴퓨터의 등장은 아무튼 국내 컴퓨터시장을 본격적인 경쟁체제로몰아가면서 독자적인 산업체계로 부상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 그 주역들로는 DG의 "노바 01".왕래버러토리즈의 "왕 2200B".DEC의 "PDP 8/E" 등 미니컴퓨터 3총사가 단연 으뜸으로 꼽힌다.
이 가운데 "노바01/1200"은 72년 5월 DG의 총판으로 출범한 인터내셔널데이터코포레이션(IDC)에 의해 국내에 첫 선을 보였다. 72년 10월의 KIST 방식기기 연구실이 "노바01/1200"의 첫 고객이다. KIST방식기기실은 나중에 이기종을 모델로 최초의 국산컴퓨터 "세종1호"를 개발한 곳이기도 하다.
IDC는 60년대말 한일은행.한국전력 등에 NCR의 전자식 회계처리기를 공급한바 있는 동아무역에 근무하던 이명진이 일본 샤프전기의 지원아래 설립한회사였다. 이명진은 동아무역 직원으로서 일본 NCR를 드나들다 샤프전기와손이 닿았고 71년부터는 아예 샤프전기 해외사업부 서울주재원으로 자리를바꿔 앉았다.
IDC의 "노바01/1200" 국내 공급실적은 그러나 신통치 않아 KIST 방직기기연구실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다. IDC는 73년 7월 샤프로부터 출자금을지원받아 한.일합작 샤프데이타코리아(현 한국샤프)로 재출발하면서 전자수첩판매회사로 업종을 전환했기 때문이다.
"노바 01" 국내공급은 73년도 한해동안 공백기를 거쳐 74년 1월 출범한 인터내셔널데이터시스템코포레이션(IDsC)에 의해 본격적으로 재개되었다. IDsC의설립자 역시 IDC가 샤프데이타코리아로 전환하면서 경영일선에서 물러나있던 이명진이었다. 이명진이 회사명칭을 굳이 IDsC로 한 것은 "노바"대리점으로서 기존 IDC의 브랜드이미지를 그대로 가져가기 위한 것이었다. IDsC는당시 미 DG사가 직접 투자한 일본의 니혼미니컴퓨터(현 일본DG)와 계약을 맺고"노바01/1200"시리즈의 한국판권을 거머쥐고 있었다. 당시 니혼미니컴퓨터는DG와 합작으로 동남아지역에 공급할 "노바01/1200" 등을 일본내에서 직접생산하고 있었다.
IDsC는 출범이후 목포상고.동광전기.건국대(이상 74년), 한국과학원.홍능기계공업.해양연구소.선박연구소(이상 75년), 삼성전자(76년) 등에 "노바01/1200"을 비롯 "노바 840" "이클립스" 등 DG 제품을 잇따라 공급, 국내에 미니컴퓨터 기종 뿌리내리기의 최일선에 나섰다. DG의 미니컴퓨터는 79년말까지39대가 국내에 보급됐다.
IDsC는 77년 4월 당시 기업확장에 열을 올리던 동양정밀공업(OPC)그룹에흡수되면서 회사이름을 동양시스템산업(OSI)으로 개명했다가 OPC의 부도로 88년 기업으로서의 최후를 맞았다.
미 DEC가 63년 세계 최초로 발표한 미니컴퓨터 계열의 "PDP 8/E"는 72년 4월전기통신연구소가 국내에 처음 도입했다. "PDP 8/E"는 그러나 같은해 도입했던 천공카드 용역업체 한국키보드를 비롯 74년말 인천제철.현대양행.강원산업에 이르기까지 국내에 뚜렷한 공급회사 없이 오퍼상 등을 통해 공급됐다.
"PDP"시리즈와 후속 "VAX 11"을 전담 공급하게 되는 동양전산기술(OCE)이발족된 것은 75년 2월이다. OCE가 배출한 인물들을 면면을 살펴보면 이 회사가당시 국내 컴퓨터업계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나를 가늠해 볼 수있다.
OCE의 중심 인물은 이윤기(전 삼보컴퓨터 및 엘렉스컴퓨터 대표).권순덕(한맥소프트웨어 대표).김영식(현 엘렉스컴퓨터 대표).김영한(하이테크마키팅연구소장).김천사(현 두산정보통신 대표).김병각(현 한국디지탈 전무).이정희(현 삼보정보시스템 대표).윤부근(부륭시스템 대표).김주현(전 삼성전관상무).김의현(현 한국디지탈 상무) 등 이었다. 여기에 정수창(전 두산그룹회장).이용태(현 삼보컴퓨터 회장).구지회(전 가인시스템 대표) 등이 직간접으로 OCE를 지원하고 있었다.
OCE가 79년까지 국내에 보급한 "PDP"시리즈는 무려 58대로서 한국IBM의 75대에 이어 업계 전체 2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OCE의 실적은 창업한 75년부터4년여의 것이고 한국IBM의 것은 67년부터 12년에 걸친 실적이었다. 75년을전후한 주요 "PDP"고객들을 보면 동양시멘트.대한전선.영남대.반도상사.한양투자금융 등을 꼽을 수 있다.
OCE가 DEC의 국내총판으로 출범한 것은 당시 가장 인기있던 "PDP"시리즈의노하우를 습득, 이를 토대로 OEM방식의 컴퓨터를 생산해 보겠다는 야망에서였다. 출범당시 두산그룹 정수창 회장으로부터 창업자금을 지원받은 것도 이때문이었다.
그러나 OEM 생산과정은 제품의 가격 결정이 여의치 않아 결과적으로는 OCE의기업경영에 막대한 타격을 주고 말았다. 그 결과로 OCE는 77년 3월 두산그룹계열 동양맥주에 의해 지분의 50%가 매각된데 이어 79년 5월 같은 그룹내합동통신의 광고기획실부문과 통합, 오리콤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광고대행 사업본부와 전산 사업본부 등 2본부체제로 출범한 오리콤은 다시83년 DEC사업을 전담해온 전산 사업본부를 두산컴퓨터라는 이름으로 독립시켰다. 미니컴퓨터 3두마차 가운데 세번째인 "왕"은 73년 10월 김덕기(전 컴퓨터코리아 대표)가 김영한, 김성중(현 기흥정보시스템 대표) 등과 설립한한국뉴콤에서 공급했다. 왕래버러토리즈는 한국뉴콤이 출범하기전 태영사라는 무역업체를 통해 한영공업(현 효성중공업)과 원자력연구소 등에 워드프로세서와 전자계산기(Calculator) 등을 공급해 왔다. 한국뉴콤이 출범하면서비로소 "왕2200A" 등 컴퓨터 기종이 국내에 들어왔는데 첫 고객은 75년의 대일유업과 금호실업이었다.
고객으로서 금호실업이 "왕"의 판권과 한국뉴콤 조직을 인수한 것은 75년6월이다. 이때부터 "왕"은 조직력과 자금력이 더해지면서 국내에서 인기가치솟아 79년말까지 30대를 공급, IBM.DEC.후지쯔.DG에 이어 국내에서 5번째로많은 기종 보급률을 기록하게 된다.
한편 컴퓨터기종 공급이 늘고 다양해지면서 전산소모품과 액세서리를 공급하는 회사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기업들로는 조우니비지니스.삼양비지네스폼.광명돗판무어(이상 연속기록 전산용지), 한일카드.데이타미디어(이상 천공카드), 유일기업.삼애기업(이상 프린터리본), 바스콤(마그네틱테이프) 등이다. 이들이 컴퓨터 분야가 70년대 중반에 독자적인 산업분야로자리매김하는데 있어 적잖게 기여를 했음은 물론이다.
서현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