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업계에 빨간등이 켜졌다. 지난해 말부터 본격화한 가격하락 추세가,반등세를 점치는 여러 시장조사기관들의 전망에도 불구하고 계속 가속도를붙여가고 있다.
지난해 말 동남아 현물시장을 비롯한 세계 스폿시장에서 근 4년 넘게 강세를보여온 D램 가격이 처음 하락세를 보였을 때 반도체업계의 반응은 수요업체들의 재고조절에 의한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실제로 당시 나타났던 현상만으로 볼 때 가격하락은 분명 IBM.애플.컴팩등 대형 수요업체들이 그간 쌓아두었던 재고를 한꺼번에 투매하면서 시작됐다. 이들 물량의 스폿시장 유입으로 현물시장의 가격이 근 4년 만에 처음으로 메이저업체의 공급가격 이하로 내려갔고, 때맞춰 터져나온 메릴린치 등증권분석기관들의 D램 공급과잉 전망은 수요 및 공급업체 모두에게 심리적으로 가격약세를 부채질하는 주요인으로 작용했다.
현물시장의 가격하락세가 예상보다 길어지자 일부 메이저업체들은 비싼 돈을주고 재고를 안고 가기보다는 싼 가격에 즉시 공급받는 쪽으로 구매전략을전환해 종전보다 오더량을 줄이는 한편, 메모리 공급업체들에게 가격인하를정식 요청하는 등 본격적인 가격하락세가 시작됐음을 예고하는 징후들이 보이고 있다.
특히 지난 연말에 한국.일본 등의 D램업체들이 그간 홍콩.대만 등 스폿시장에서 12달러를 호가하던 4MD램의 가격을 처음으로 10달러대로 내려 공급한것이 가격붕괴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후문이다. 공급업체 입장에선 실적달성을 위한 임시방편이었지만, 수요업체의 재고물량도 아니고 세계적인D램 공급업체들이 가격을 내려 공급했다는 사실은 메이저 수요업체는 물론현물시장 관계자들에게는 공식적인 가격하락의 전조로 비춰지기에 충분했다는분석이다.
4MD램에서부터 시작된 가격하락이 최근들어 16MD램으로 확산되자 국내반도체업체들은 지난해 말에 보인 반응과는 달리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일시적이나마 16MD램의 가격이 30달러선을 기록하자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기 시작했고, 일단은 D램 가격하락을 대세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로 돌아섰다. 특히 가격반등과 관련한 논란보다는 가격 마지노선을 정해 공급업체의의도대로 가격하락을 유도해 나가는 쪽으로 시장전략의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또 최근들어 4MD램의 마지노선으로 잡았던 7달러선이 무너지자 "4MD램 포기"전략도 강력하게 대두되고 있다. 4MD램의 가격급락이 16MD램 가격의 동반하락을 부추기고 있다는 판단이다. 일 히타치로부터 고개를 들고있는 이같은 전략은 국내업체들에까지 확산될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국내 반도체 3사를 포함한 세계 D램업체들이 향후 가격하락의 관건으로보고 있는 문제는 4MD램 생산포기 전략에서 극명하게 나타나듯이 16MD램이다. 국내업체들이 96년말 기준으로 잡았던 16MD램의 당초가격 지지벽은30달러. 그러나 올초 한때 현물시장에서 22달러선까지 곤두박질치자 28달러선으로 하향조정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감가상각 등을 고려한 최저가라는게 업계의 설명이다. 이렇게 될 경우 반도체수출은 당초 계획과는 달리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된다. 그동안 단일품목으로 국내 전체수출액의 20%를 차지할 정도로 수출의 효자노릇을 해온 명성도 퇴색될 가능성도 높아질 것으로보고 있다.
그렇다고 모두 경기를 비관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가격하락이 하나의대세로 자리잡을 것만은 분명하지만 TI 등 몇몇 유력 반도체업체들은 경기회복에 따른 가격반등을 점치고 있다. 이같은 경기회복은 현재 가속도가 붙은D램 가격하락세를 상당부분 완화시켜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 데이터퀘스트 등이 최근 전망한 가격추이도 분명 우려할 만한 수준은아니다. 데이터퀘스트의 예상대로 메가비트당 가격이 97년 1.5달러, 98년 1.
2달러, 99년 0.8달러 정도로만 유지돼도 적정마진은 보장될 것으로 업계는보고 있다. 이럴 경우 97년 16MD램의 가격은 22달러 정도로 반도체 사이클상정상적인 가격이라는 주장이다.
상황이 비관론과 낙관론 어느 쪽으로 흘러가든 간에 당초 국내 반도체 3사가꿈꿨던 계획과는 거리가 먼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아직도 반덤핑문제로발목이 잡혀 있는 LG반도체와 현대전자는 가격고수와 수출시장 점유율을놓고 크게 고심해야 할 한해가 될 것으로 보인다. 시장고수를 위한 본격적인가격싸움을 할 경우 반덤핑 족쇄가 지속될 게 뻔하고 이를 피할 경우 시장을놓칠 우려가 높아지는 괴로운 상황이 연출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반덤핑혐의에서 벗어난 삼성전자도 종전과 같이 순이익이 수조원에달했던 "이상호황"을 더 이상 꿈꾸기는 어렵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국내업체들은 이에 따라 범용보다는 EDO.싱크로너스 등 성능이 좀더 우수한 제품생산을 확대해 부가가치를 지키는 방안을 적극 강구중이다. 여하튼 가격급락으로 새롭게 짜지고 있는 반도체시장은 국내 반도체 3사에게 대응능력에따라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가져다줄 것으로 업계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지난 4~5년간 누렸던 이상호황 시절은 분명 지나갔다"고 전제하며 "그러나 가격하락으로 인한 어려운 시장상황은 선발업체보다는후발업체들에게 더 많은 타격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점에서 재도약을 위한 또다른 기회가 될 가능성이 많다"고 말했다.
<김경묵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