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반도체산업은 방위산업 중심의 군수용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따라서국가전략적 성격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컴퓨터의 개발도 전쟁의 효과적 수행이라는 목적에서 출발했으며 미국이 자랑하는 무선정보통신기술도 사실상2차 세계대전이 낳은 성과의 하나로 꼽힌다. 트랜지스터 역시 각종 무기의고성능화와 휴대의 간편성을 높이는데 우선적으로 활용됐다.
그러나 2차대전이 끝나고 세계평화가 지속되자 미국 반도체산업의 발전속도는 현저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87년 이후에는 세계 가전시장에서발판을 마련한 일본에게 시장규모와 공급면에서 모두 뒤져 1위 자리를 넘겨주는 비운을 맞보기도 했다. 하지만 90년대 들어서면서 민·관 협력으로 경쟁력 회생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93년에 선두자리를 되찾았고 이후 쾌속성장을 구가하는 저력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는 정부와 산업계가 공동으로 추진한 기술인프라 구축이 커다란 힘으로 깔려 있다.
일본의 반도체산업이 어플리케이션 중심의 응용제품이 많고 메모리분야에서 특히 강세를 보이고 있다면 미국은 설계기술, 기초기술면에서 세계 제일의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일본에게 빼앗겼던 선두자리를 불과 2년여만에다시 찾은 것도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함께 바로 이같은 넓은 기반기술 저변이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미국은 메모리분야에서는 일본과 우리나라에 뒤지지만 마이크로프로세서를중심으로 한 비메모리분야에서는 사실상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 마이크로컨트롤러는 일본과 세계시장을 양분하고 있지만 인텔社가 주도하는 마이크로프로세서는 전 세계시장을 거의 독점하고 있다.
미국은 방위산업을 제외하고는 일본처럼 정부가 나서서 산업을 선도하는등의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다. 통산성을 앞세운 일본과 같이 산업정책을 통해 민간기업활동을 지원하거나 특정 산업분야에 대한 기술향상을꾀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는 정부의 간섭을 최대한 억제하고 자유로운 기업활동을 보장하는 미국적 사고방식 탓이 컸다.
그러나 80년대 후반부터 일본의 거센 도전으로 미국의 반도체산업은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의 저력이 정부 주도하의 반도체산업 육성책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지면서 인식도 판이하게 달라졌다.
민간업계는 반도체산업에 대한 지원강화를 정부기관에 건의하기 시작했고연구개발 프로젝트에 대한 자금보조 및 산업보호를 위한 법률제정 등을 포괄적으로 요구했다.
이에따라 정부의 관련조사위원회도 반도체산업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게됐고 미국경제에 대한 위기감이 팽배해진 분위기에 편승, 적극적인 자국산업보호와 외국산 반도체에 대한 견제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미국 반도체업계에는 세가지 유형의 관·민 공동의 반도체산업 지원단체가 탄생하게 되는데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 개발연구기관인 반도체연구조합(SRC), 세마테크(SEMATECH) 등이 바로 그것이다.
SIA가 업계의 요구를 정부당국에 전달하는 창구로 장기적인 미국 반도체산업의 기술발전정책 수립에 힘쓰고 있다면 14개의 업체가 모인 컨소시엄 형태로 구성된 세마테크는 실질적인 반도체기술계획(로드맵)을 작성하고 산·학·연의 연구개발 기능을 연계시키는 핵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대학을중심으로 설계기술을 포함한 기초기반기술 연구의 지원체제를 확립해준 SRC도 미국 반도체산업을 회생시킨 또 하나의 軸이다.
미국 반도체산업의 부흥은 이처럼 당국의 체계적인 지원과 유관단체간 역할분담식의 유기적인 협력체제, 그리고 산·학·연간의 잘 짜여진 연구기능등이 기반이 됐다는 점에서 국내 반도체산업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김경묵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