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과학기술처가 펴낸 컴퓨터산업 편람을 살펴보면 71년부터 75년 사이 우리나라 컴퓨터 보급대수는 미니급과 메인프레인급을 합쳐 모두 98대에이른다. 이 가운데 한국IBM이 공급한 대수는 41대나 된다.한 기업의 시장점유율이 40% 이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한국IBM이 공급한 기종은 「시스템(S)/360」과 「시스템(S)/370」등 대부분 메인프레임급이었다. 같은 기간 동안 디지탈이큅먼트(DEC)·데이터제너럴(DG)·왕래버러토리즈 등 미니컴퓨터 3총사가 30여대를 공급했는데도입가격으로 따지면 미니급에 비해 메인프레임급이 10∼1백배나 비쌌으니그야말로 한국IBM의 시대가 아닐 수 없었다.
IBM관계자들은 미국IBM이나 한국IBM 모두 이 시기가 기업적 사활에 매우중요한 분기점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우선 60년대 말까지 몇 안되던 컴퓨터회사들이 70년대 초반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 시작했고 컴퓨터 기종도 용도에 따라 다양하게 특화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또 주된 컴퓨터 고객층인 기업에서는 세계적으로 생산성 향상이라는 일종의 기업재구축 운동이 활발하게 일고 있었다. 따라서 기업생력화나 인력 재배치 등과 관련, 컴퓨터 도입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기업의 이같은 움직임은 70년도부터 불어닥친 선진국들의 경기침체, 중동전쟁으로 야기된 원유가 폭등에 따른 자구책이었다. 기업은 이 자구책을 강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컴퓨터 도입을 시도했던 것이다. 따라서 컴퓨터공급회사 입장에서 본다면 이 시기는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IBM이 이같은 격동기를 기업중흥에 얼마나 유효적절하게 이용했는가는 여러가지 증빙 자료들이 많다. 73년 IBM본사의 매출은 벌써 1백억 달러, 직원은 25만명이 넘어서고 있었다. 한국IBM의 성장은 이보다 더 비약적이었다.
이 기간 동안 한국IBM의 자본금 추이를 보면 70년 2억7천3백만원에 불과하던 것이 75년에는 무려 7.6배가 증가한 20억8천만원에 이른다. 또 매출액은70년 1억8천만원이던 것이 75년에는 15배가 증가한 27억5천만원에 달하고 있다.(당시 쌀 1가마에 1만5천원).
한국IBM의 75년도 매출액 27억5천만원은 당시 우리나라 컴퓨터산업 총규모56억원(추정치·당시 컴퓨터 관련업체 매출 합산치)의 50%를 넘어서고 있다.
이 기간 동안 한국IBM을 떠받치고 있던 컴퓨터 기종은 메인프레임급인 「S/360」 「S/370」과 「IBM 1130」등 3개 기종이었다.한국IBM의 시장점유율이40%가 넘었으니 이 3개 기종은 70년 중반까지 우리나라 컴퓨터 환경을 좌우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 가운데 「S/360」은 데이터의 연산과 기억장치에 논리회로를 사용하기시작한 제3세대 컴퓨터의 원조격으로 한국IBM에게는 컴퓨터 회사로서 영업적기틀을 마련해준 기종이다. 「S/360」은 특히 세계 최초로 고체논리회로 반도체를 사용했을 뿐 아니라 처음으로 표준 아키텍처 기술을 사용한 컴퓨터로기록되고 있다.
중심이 되는 표준 아키텍처를 기본으로 여러가지 다양한 변형 모델을 만들어 모델간 소프웨어 호환성을 강조한 「S/360」시리즈는 모두 13개모델이 발표됐다.
「S/360」은 68년 경제기획원 통계국에 처음 설치된 이후 락희(현LG화학)·한국전력·연합철강·대한항공 등을 포함 모두 10대가 국내 공급된 바 있다.
「S/360」 후속인 「S/370」시리즈는 71년말 첫 모델 「S/370-135」 발표이후 77년까지 7개 계열 14개 모델이 발표됐다.「S/370」은 단일체 집적회로(IC) 메모리 반도체를 채용한 3세대 제2기 컴퓨터로서 「S/360」과는 개념이나 성능 면에서 달랐다. 가상 기억장치 개념을 도입,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실제 기억장치보다 훨씬 큰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물리적메모리 한계를 극복한 것도 이 기종의 특징이었다.
「S/370」은 72년 국방부를 필두로 75년 말까지 조선공사·경제기획원·금성사 등에 19대가 공급됐다. 「S/370」은 또 81년까지 10년 동안 한국IBM의주력 공급 기종으로 모두 59대가 팔려 나가는 대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IBM 1130」은 2세대 「IBM 1401」을 잇는 후속 중형급 컴퓨터로서 과학기술 계산에 강점을 갖고 있어 특히 미국의 거의 모든 대학들이 도입해서 사용했을 만큼 인기가 있었다. 국내에서도 69년 숭실대를 시작으로 서울대·중앙대·동국대·고려대·인하대 등에 보급됐다. 농업진흥공사·대한항공·호남정유 등도 이 기종을 도입, 사용한 적이 있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71년부터 75년까지 한국IBM의 역할이 돋보이고 있는 것은 이 기간 동안 이회사가 컴퓨터를 공급한 기관이나 기업의 면모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기간동안은 특히 유신정권이 탄생하고 기반을 닦는 시기였다는 점에서 정부정책은 정치적 안정과 경제부흥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기업과 기관의 컴퓨터도입 붐은 바로 이같은 흐름에 민감하게 얽혀 있었던 것이다.
우연의 일치라고 만은 할 수 없겠지만 이 기간 동안 한국IBM의 고객은 크게 군·제조업·교육기관 등 3분야로 대별되고 있다. 특히 군의 경우 69년의육군본부에 「S/360」을 공급한 것을 비롯, 72년과 73년 국방부와 공군본부에 잇따라 「S/370」을 공급했고 74년과 75년에는 해군본부에 각각 「S/3」과 「S/370」 등을 납품, 한국IBM은 3군과 국방부를 함께 휩쓰는 전무후무한실적을 올리도 했다.
교육기관은 주로 대학으로서 서울대와 고려대를 비롯, 전자계산학과 명문들인 숭실대·동국대·인하대·중앙대 등이 포함돼 있다.
제조업은 이 시기에 정부의 부흥책이 집중되던 전자·석유·화학·철강·조선 등 분야로서 한국IBM은 연합철강·호남정유·대한조선공사·현대중공업·한국중공업·금성사·럭키·경인에너지·동아제약·제일모직 등 당대에 최고로 잘 나가던 기업과 정부투자 기업들을 고객으로 확보했다.
3대 고객 분야 가운데 한국IBM이 가장 신경을 썼던 곳은 역시 군의 총본부인 국방부였다. 국내 처음으로 「S/370」을 도입한 국방부의 전산화는 정부기관 중에서는 경제기획원에 이어 2번째였지만 처리업무의 성격이나 그 파급효과를 따지면 프로젝트 규모는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실제 국방부 전산화는 훗날 정부기관들의 견학장소로 빈번하게 이용됐을뿐 아니라 육해공군·농수산부·국민은행·재무부·내부무·치안본부 등 다른 기관들의 컴퓨터 도입기종 결정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국IBM으로서도국내에서 「S/370」시대를 여는 시금석이 됐다.
한국IBM은 당시 1백여명의 직원 전원이 모두 국방부 프로젝트에 매달리다시피 했고 개발자들은 프로그램 호환성 테스트를 위해 일본IBM을 수없이 오고갔다. 92년에 편찬된 한국IBM의 社史 「한국아이비엠 25년 발자취」에는당시의 급박한 상황이 다음과 같이 한 도막의 에피소드로 소개돼 있다.
『유재흥 국방부 장관(당시)과 각군 참모총장이 참석하게 돼 있는 72년 12월18일 국방부 전산화 개통식을 하루 앞둔 17일, 「S/370」의 CPU보드가 갑자기 고장을 일으켜 다운되는 사태가 발생하자 한국IBM의 라스무센 사장(당시·미국인) 은 그날이 일요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일본IBM에 날아가해당부품을 구입, 교체함으로써...』
한편 「S/360」과 「S/370」이라는 연타석 홈런에 힘입은 한국IBM은 73년,창업 6년 만에 처음으로 3천여만원의 흑자를 내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이흑자기조를 기반으로 한국IBM은 73년12월 제4대 사장에 미국인이 아닌 한국인 직원 崔垠拓(68년 입사)을 처음으로 대표이사 사장에 내부 승진발령하게된다.
한국인을 대표이사로 선임한 것은 다국적 기업의 현지화 일환이었다고 볼수 있는데 이에 걸맞게 최은탁은 취임 첫해 8억8천만원에 불과하던 한국IBM의 매출액을 6년 만에 1백억원대로 끌어올렸다. 한국IBM은 또 당시 『현지국가사회에 대한 기여가 영업 못지않게 중요한 경영목표이며 이를 도외시한다국적기업은 살아남지 못한다』는 기업시민 정신을 발표,화제를 모으기도했다.
이같은 기업시민 정신에 따라 한국IBM은 국내진출 외국 기업으로서는 처음으로 학술지원 사업을 펼쳤는데 그 내용은 국내 유수의 젊은 과학자를선발,세계 최첨단 IBM왓슨연구소를 1년간 연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 완슨연구소 연수프로그램 수혜자들을 보면 김길찰·김성철·좌경룡·안광덕·정원량·김진형(이상 KAIST교수)·김성운(고대 교수)·이범천(큐닉스컴퓨터 회장)·이기준·고건·이석호·최양희(이상 서울대 교수)·박승규(아주대 교수)등이다.
<서현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