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컴퓨터 파노라마(16);도약기(2)

상공부 정책의지와 전자기술연 출범

적극적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상공부가 우리나라 컴퓨터산업 육성에 처음으로 직접적인 의지를 보인 것은 69년 1월 전자공업진흥법이 제정되면서 부터이다.

사실 상공부는 67년 개원한 과학기술처가 처음부터 컴퓨터를 포함한 정보산업 정책을 일괄하는 바람에 한동안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물론 상공부의컴퓨터산업에 대한 본격 개입은 전자공업진흥법이 시대와 상황논리에 맞게개정되고 처음으로 정보기기과라는 독립기구가 증편된 81년부터라고 할 수있다.

그러나 이미 69년의 전자공업진흥법 제정 때부터 상공부는 컴퓨터산업 정책을 직접 수행하고자 하는 의지만은 분명하게 나타내 보이고 있다. 전자공업진흥법은 실제 70년대 중반 이후 국내 전자공업계에 컴퓨터 하드웨어 국산화라는 거센 열풍을 몰아오는 실질적 계기와 분위기 조성 역할을 했다.

이런 역할은 81년 법개정시 『전자공업의 발전이 앞으로는 컴퓨터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여론을 몰아왔고 이어서 「전자계산조직(컴퓨터일반)을 전자공업의 범위안에 포함한다」는 것을 법조문에 명확하게 하는 성과로 이어졌다. 상공부가 국내 정보산업 정책 주도권 경쟁의 전면에 나설 수있도록 해 줬던 셈이다.

전자공업진흥법은 사실 전자산업을 통해 경제부흥을 꾀하자는 정부 의지가강하게 담겨 있었다. 정부는 당시 59년 금성사가 진공관식 라디오를 조립 생산한 이후 싹이 보이기 시작한 우리나라 전자공업에 획기적 전환기를 마련하기 위헤 이 법을 제정한다고 그 배경을 발표하기도 했다.

전문 16조와 부칙으로 된 전자공업진흥법에 의해 같은 해인 69년 탄생된것이 바로 「전자공업진흥 8개년 계획」이라는 중장기 전자제품 개발 계획이다. 상공부가 마련한 이 계획은 69년부터 71년까지 1단계, 72년부터 76년까지 2단계로 나눠져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이 상공부로 하여금 80년에서 90년대 초반까지 국내 정보산업을 주도할 수 있는 단초가 되리라는 것을 당시로서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8개년 계획 가운데 1단계에서는 기본전자부품(컨덴서 등 17개 품목)·반도체(집적회로 등 10개 품목)·민생용 전자기기(TV 등 9개 품목)·산업용전자기기(특수전화기 등 10개 품목)·전기측정기기(오실로스코프등 9개 품목)·전자재료(세라믹소재 등 7개 품목)등 7개 분야 62개 품목의개발과제들만 포함돼 있었다.

2단계에서는 1단계 7개 분야에서 제외된 전자복사기 등 27개 품목과 신규로 전자계산기와 군사용 전자기기 등 2개 분야 6개 품목이 세로 추가된다.

눈여겨 볼 대목은 바로 2단계에서 추가된 전자계산기 분야인데 여기에는 탁상용 전자계산기·중형전자계산기·카드천공기(PCS)·자동 프로그램공작기(수치제어공작기)·세밀절단기 등이 포함돼 있음을 볼 수 있다.

상공부는 「전자공업진흥 8개년 계획」의 2단계에서 전자산업 개발 체제의확립을 위한 기본 목표를 제조기술의 연구개발, 양산체제의 확립, 생산의 합리화 등 3가지로 정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상공부는 특히 제조기술의 연구개발 부문을 산학연의 연결고리로 삼는다는 방침 아래 8개년 계획이 마무리될 즈음인 76년 12월 30일 국내 최초의 컴퓨터와 반도체 전문 출연연구소를출범시키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한국전자통신연구소(ETRI)의 전신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다.

76년 12월 6일 발표된 정부 계획에 따르면 한국전자기술연구소의 설립은정부출연 41억원, 민간출연 10억원, IBRD차관 1천1백만 달러 등 모두 1백6억원의 거금이 투입되는 대규모 사업이었다. 또 제4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에이 연구소 출범일정이 포함돼 있었던 터라 당시 경제정책 최고 기구였던 무역진흥확대회의를 통해 대통령에 그 전모가 보고됐을 만큼 비중이 컸었다.

구체적 게획에는 구미공업단지에 부지 3만평을 매입해서 78년 6월까지 컴퓨터 및 반도체 전문 대단위 기술연구용 단지를 건설한다는 것도 포함 돼 있었다.

연구소의 주요 사업은 전자계산기 부문에서 상용제품 제작 및 국산화추진·관련공장의 운영·기술훈련·기술지원 등이었고 반도체 부문에서는 반도체의 설계·제조·공정 및 양산 기술의 국산화 추진 등이었다.

출범과 함께 한국전자기술연구소 초대 이사장에는 한국전자공업진흥회장이던 朴勝璨(당시 금성사 대표이사, 작고)이 임명됐다. 이는 한국전자공업회장이 당연직으로 한국전자기술연구소 이사장을 겸한한다는 규정에 따른 것이었다.초대 연구소장은 KIST소장을 역임한 바 있는 韓相準(현 한양대명예총장)이 내정됐다.

한국전자기술연구소 기본 운영 방침은 그동안 과기처 산하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의 컴퓨터국산화연구실을 중심으로 진행돼온 컴퓨터와 반도체부문의 연구개발 활동을 한곳에 집중시킨다는 것이었다. 즉 KIST 컴퓨터국산화연구실을 정부 출연기관으로 전환시켜 상공부 통제하에 놓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한국전자기술연구소의 출범은 상공부가 우리나라 정보산업정책 결정의전면에 나설 수 있는 디딤돌을 마련해준 셈이다.

76년말 출범한 한국전자기술연구소는 실제 79년 구미 연구단지가 완공될때까지 서울 사당동과 역삼동 임시 사무실을 전전하면서도 16비트 및 32비트초소형(마이크로)컴퓨터에 대한 유닉스 운영체제 이식기술, 8비트 및 16비트마이크로컴퓨터 개발에 착수하는 등 좋은 출발을 보이고 있었다. 한국전자기술연구소는 특히 컴퓨터하드웨어(탁상용 전자계산기 또는 중형 전자계산기)국산화에 대단한 의지와 열의를 보였다. 당시 국내 전자산업 성장률은 매년고무줄 늘어나듯 신장되고 있었는데 예컨대 주력 수출 품목이던 흑백TV는 69년 이래 연 평균

컴퓨터 하드웨어의 국산화 추진 분위기는 바로 흑백TV의 신화를 재장조하자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전자기술연구소에서 컴퓨터 국산화를 사실상 진두지휘한 이가 바로 李龍兌(현 삼보컴퓨터 회장)이다.

70년 미국에서 귀국한 李龍兌는 76년 KIST 컴퓨터국산화 연구실장으로 재직하다 78년부터 한국전자기술연구소 부소장을 역임하기도 한다. 그가 이연구소에서 개발한 것이 국내 최초의 마이크로컴퓨터 「HAN-8」이다. 李龍兌는당시 한국전자기술연구소의 출범 배경과 컴퓨터 국산화 상황과 관련,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우리나라 전자공업은 연간 40∼50%씩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추세라면80년대에는 영국을 앞질러 세계5위에 들어야 한다고...중략...그렇게 하려면전자공업이 선진화돼야 하고 따라서 컴퓨터와 반도체를 만들어야 하는데 아직 민간회사에서는 여건이 미성숙...중략...그래서 정부 차원에서 민간회사에 어떻게 도움을 줄거냐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예컨대 생산준비·실험준비·개발시설을 완비하고 필요한 기술인력을 모두 준비해 놓으면민간회사에서 초기 투자없이 컴퓨터산업에 막바로 뛰어들 수 있지 않은가...

중략...바로 그 역할을 한국전자기술연구소가 하려는 것이었습니다.』(경영과컴퓨터 81년7월호)

이어 그는 「HAN-8」의 개발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어 당시 상공부의 입장이 무엇이었는가를 대변해주고 있다.

『「HAN-8」은 16비트인 「HAN-16」을 위한 준비단계 작품이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이미 78년경 8비트 마이크로컴퓨터가 이미 시장에 나왔고 82년경에는 16비트, 86년경에는 32비트제품이 완성될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의 당면목표는 16비트 제품을 선진국과 동시에 세계시장에 내놓는 것입니다.』(경영과컴퓨터 81년7월호)

사실 상공부가 KIST 컴퓨터국산화연구실을 한국전자기술연구소로 개편하려했던 것은 당시 컴퓨터 국산화와 생산에 매우 적극적이던 업계 분위기가 한몫을 거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금성전기·동양전산기술(현 두산정보통신 전신)·고려시스템산업(92년 폐업) 등이 대표적인 기업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삼성전자는 미국 휴렛팩커드와 제휴하여 OEM방식의 미니 컴퓨터생산을 추진하고 있었고 금성전기는 일본 NEC의 미니컴퓨터 생산을 계획하고 있던 중이었다. 또 동양전산은 이미 75년경부터 미국 DEC와 합작생산 체제에 돌입해 있었고 고려시스템·금호실업·금성통신·쌍용양회·선경 등도외국회사와 기술제휴선을 찾고 있던 중이었다.

한편 한국전자기술연구소 출범과 때를 같이하여 또 하나의 연구소가 설립되는데 바로 과기처 산하의 KIST 부설 한국전자통신연구소였다. 이 연구소는77년에 한국통신기술연구소로, 다시 81년에 한국전기통신연구소로 2번에 걸쳐 명칭을 변경하며 우리나라 통신기술 개발지원을 담당하게 된다.

한국전자기술연구소와 한국전기통신연구소 외에 비슷한 기관으로 KIST 전산개발센터라는 곳이 하나 더 있었다. 과거 KIST 전자계산소가 확대 개편된전산개발센터는 비록 KIST의 부설 용역기관이었지만 연구개발 성격도 강해당시 척박했던 우리나라 소프트웨어 개발지원 부문을 사실상 책임지고 있었다.

이를테면 70년대 중반 이후 우리나라 정보산업 영역은 컴퓨터 하드웨어·소프트웨어·통신 등 3대 분야로 짜여져 있었고 각 분야 마다에는 개발지원을 담당하는 연구소가 하나씩 있었던 셈이다. 결국 이시기의 움직임을 해당정부 부처의 역할로 풀이해 본다면 과기처는 상공부에 일정 부분 역할을 자의반타의반으로 넘겨준 것이고 상공부는 「전자공업 입국」 또는 「수출 지상주의」에 정보산업을 포함시켜보려는 강한 의지를 보인 것이라 하겠다.

<서현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