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쯔의 한국진출과 포항제철의 전산화
국내 컴퓨터역사에서 일본계 기업의 첫 진출기록은 후지쯔가 갖고 있다. 74년 2월 후지쯔는 서울 종로 소재 합통통신회관 빌딩(현 국세청)에 1백%(1억9천8백만원) 단독 출자한 현지법인 화콤코리아(현 한국후지쯔)를 설립한다.
화콤코리아의 출범은 이어 히다치와 일본전기(NEC)의 한국 진출을 불렀다.
더욱 의미있는 것은 IBM·스페리랜드·컨트롤데이터(CDC)·디지탈이큅먼트(DEC) 등 미국계가 휩쓸던 당시 국내 컴퓨터업계에 후지쯔 중심의 일본계 견제세력이 형성되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는 점이다. 또 당시 단순 키펀치용역에머물던 국내 소프트웨어 개발 수준을 운용체제(OS)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계기도 제공했다. 실제 출범 3년 만인 77년 화콤코리아는 무려 55만 달러어치의 OS를 개발, 일본에 수출하게 된다.
화콤코리아가 출범한 74년은 우리나라 컴퓨터역사가 도입기와 적응기 등시행착오 과정을 거쳐 이제 막 도약기로 접어드는 시점이다. 이미 60년대 말진출한 IBM·CDC·스페리랜드와 달리 70년대 중반에서야 비로소 한국 진출을하게 된 배경에는 여러가지 비화가 있다. 화콤코리아가 당시 우리 정부의 외자도입법에 크게 제약을 받지 않고 출범하게 되는 과정이 그 가운데 하나이다.
화콤코리아를 출범시키기 전까지 후지쯔는 한국내 영업을 일본본사가 직접챙겼다.
후지쯔는 67년에 국내에 「파콤222」기종을 첫 판매한 이후 화콤코리아를출범시킬 때까지 11대의 컴퓨터를 한국에 공급했거나 계약한 상태였는데 모두 일본 본사의 직접 영업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이미 7년 전에 현지법인을출범시킨 IBM의 22대에 이어 2위에 해당하는 실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후지쯔가 한국 진출을 미룬 것은 일본 본사 자체가 컴퓨터 사업을 시작한 지얼마되지 않아 현지법인 출자 여력이 없었던 데다 한국내 컴퓨터 마인드도신통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판매된 11대 가운데 한양대에공급된 「파콤230-10」 등 7대 이상이 이른바 대일청구권 자금에 의해 들여온 것이었다. 후지쯔 입장에서 보면 특별한 판촉활동 없이도 한국에서의 영업실적이 좋았다는 얘기다.
실제 후지쯔가 한국에 직판했던 11대 가운데 정부부처 및 공공기관 5대,육사를 포함한 대학 5대, 포항제철 1대 등으로 민간기업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볼 대목은 후지쯔가 포항제철을 고객으로 확보했다는 점이다. 포항제철은 화콤코리아가 출범하기 7개월 전인 73년7월에 공급계약을체결하고 출범 후인 74년 4월 「파콤230-25」기종이 설치된 곳이다.
94년 펴낸 한국후지쯔 사사 「한국후지쯔20년사」에는 『화콤코리아 설립을 위한 중요한 분수령은 73년 포항제철 전산설비의 수주 성공이었다』고 적고 있다. 초창기 화콤코리아에 재직했던 Q씨는 『포항제철을 고객으로 확보하지 못했다면 후지쯔의 한국진출은 최소한 80년대 이후로 연기됐을 것』이라고 들려주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후지쯔는 73년 초부터 국내 컴퓨터업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포항제철 전산화프로젝트 수주전에서 IBM·CDC·스페리랜드(유니백) 등미국계 빅3와의 치열한 경쟁 끝에 당시 포항제철 사장 박태준의 최종 낙점을받는데 성공한다. 객관적 상황으로는 후지쯔가 낙점받을 이유가 거의 없었다. 빅3는 모두 60년대 말에 한국에 현지법인을 설립, 본격적인 영업망 및사후지원 체계를 갖추고 있었고 기종의 지명도에서도 후지쯔 「파콤」을 앞서고 있었기 떠문이다.
포항제철을 고객으로 확보하는데 성공한 후지쯔는 한달 만인 73년 8월 경제기획원에 외국인 투자인가 신청서를 제출, 현지법인 설립작업에 나서게 된다. 기종결정 후 곧 바로 투자인가 신청서를 낸 것은 67년 IBM이 국내 진출할 때와 비숫한 상황이 벌어졌음을 상기시켜줄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IBM은 경제기획원에 「IBM 1401」을 공급하면서 현지법인 한국IBM을 설립, 사후지원을 책임진다는 약속을 한 바 있다.
물론 포항제철 입장에서도 「파콤」을 택한 분명한 이유는 있었다. 70년대초반을 전후한 포항제철의 움직임을 살펴보자.
70년 부터 73년 7월까지 이어진 포항제철의 제1기 설비공사에서 일본통으로 알려진 박태준은 모든 모델을 세계 제1의 제철소인 신일본제철소에서 찾았다. 박태준은 또 담당자들에세 2기·3기·4기 설비공사와 밀접한 관계가있는 일관공정체계의 전산화 모델 역시 신일본제철소의 사례를 따르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신일본제철소가 도입한 전산시스템은 바로 후지쯔의 「파콤」기종이었다. 이 때문에 후지쯔는 신일본제철소 전산화 경험을 토대로 포항제철의공장설비 설계 과정에 개입함으로써 어느 정도 영행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전해지고 있다. 또 포항제철 설립과정을 자문, 73년 우리 정부로부터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던 아카자와(赤澤璋一)씨가 기종 결정 당시 후지쯔 본사의 전무로 재직중이었다. 물론 이런 것들이 포항제철의 기종결정과 후지쯔의 현지법인 설립에 계기가 됐다는 구체적 증거는 없다.
73년 8월 경제기획원에 외국인 투자인가 신청서를 제출했던 후지쯔가 화콤코리아의 설립인가를 받아낸 것은 이로부터 5개월 만인 74년 1월이다. 신청서 제출로부터 인가가 날 때까지의 소요기간은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약간 긴편에 속했다. 상황이 다르긴 했지만 IBM이나 CDC의 경우 2~3개월 가량이 소요됐다는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일이 많이 소요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후지쯔는 법적으로는 화콤코리아의 출범이 불가능했던 것을 가능하게만들었다.
화콤코리아의 출범인가가 늦어진 것은 후지쯔가 제출한 투자인가 신청서가우리 정부의 외자도입법에 배치되는 내용으로 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외자법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60년대 후반, 외국인 투자를 적극유치하기 위해 제정됐다가 72년 이후 일본기업들의 진출이 급증하자 73년 3월 개정에 이르게 된다. 이때 개정된 외자법은 외국인 투자 대상을 선별할수 있도록 하고 외국인 출자비율도 50%를 넘지 못하도록 규정해 놓고 있었다. 즉 합작법인 형태만 투자를 인가해 주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후지쯔는 처음부터 이 법을 어길 요량이었던지 한국측 합작파트너를 확보하지 못한 채 신청서를 접수시켰다. 대신 『「파콤」용 OS를 개발·제조·수출하고 기술을 한국에 이전 한다』라는 것을 골자로 하는, 당시로서는 파격적 투자사업 내용을 제안했다.
우리 정부가 이같은 단독출자 신청을 받아들인 것은 외자법상의 분명한 「예외조치」 였다. 「한국후지쯔20년사」에서는 당시 이같은 예외조치의 수용을 위해 일본 후지쯔 관계자들이 재무부·상공부·문교부·과기처 등 관련부처를 직접 방문, 「양해」를 얻어 마침내 74년 1월 경제기획원으로부터 조건부 투자인가를 얻어냈다고 적고 있다.
당시 경제기획원의 화콤코리아에 대한 투자인가는 「파콤」용 OS를 개발해서 전량 후지쯔로 수출할 것과 회사 설립후 3년 이내에 30%, 5년 이내 50%의주식 또는 지분을 한국인에 양도한다는 조건부였다. 그러나 화콤코리아는 이후 여러번의 자본금 증자 과정이 있었지만 조건부를 이행하지 않았고 한국후지쯔로 개명한 현재까지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
화콤코리아의 초창기 멤버 가운데 황칠봉(효성데이터시스템 사장)·김용대(선경정보시스템 전무)·이의일(세중컴퓨터시스템즈 사장)·송재형(타스크포스시스템 사장)등이 아직도 현직에서 활동중이다.
한편 화콤코리아를 출범시킨 후 후지쯔는 한국에서 미국계 기업들 못지않은 왕성한 사업을 벌이게 된다. 사업 부문은 크게 「파콤」시리즈의 영업(하드웨어 임대)과 투자인가서 상에 명기했던 OS개발 및 수출 등 두 갈래로나누어져 있었다.
「파콤」영업의 경우 출범 당시 국내 공급실적이 11대였던 것이 2년 만인76년에 26대에 이르는 등 큰 폭의 신장세를 보였다. 이같은 신장세는 특히당시 김대중 납치사건과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 등 한일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은 상황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각종 후일담이 적지않게 전해지고 있다.
이 기간 동안 화콤코리아에 주재했던 한 일본인 직원은 『외출시 일본어를사용하지 말 것, 넥타이 차림의 정장을 하지 말 것』 등을 지시받은 기억이난다고 「한국후지쯔20년사』에서 회고하고 있을 정도다.
화콤코리아의 당시 주력 기종은 「파콤 230」모델로서 IBM의 대형시스템「시스템/360」에 대응하는 x5시리즈와 「시스템/370」에 대응하는 x8시리즈였다. x5시리즈란 이를테면 「파콤230-25」·「파콤230-35」, x8시리즈는 「파콤230-58」·「파콤230-48」 하는 식의 명칭이었다.
화콤코리아는 첫 고객으로 포항제철이라는 대어를 낚은데 이어 75년에는 IBM의 「시스템/360」을 사용하던 한국전력을 「파콤230-45S」로 리플레이스(Replace:기종대체 또는 타기종으로 업그레이드)시키는 혁혁한 성과를 올리기도 한다.
OS개발과 수출사업부문 역시 출범 이듬해인 75년부터 곧바로 흑자로 돌아설 만큼 호조를 보였다. 주요 개발분야는 핵심부분인 작업관리(Job Mamagement)를 비롯, 컴파일러·어셈블러번역기·분류/병합(Sort/Merge)프로그램과프로그램 동작상태를 추적하는 대화형 디버거(Interactive Debuger), 각종시스템유틸리티 등 OS를 구성하는 것들로서 고난도의 기술을 요하는 것들이었다.
이렇게 개발된 OS는 모두 일본 후지쯔에 수출됐는데 출범 첫해 14만 달러이던 것이 75년에는 39만 달러, 76년에는 55만 달러, 77년 76만 달러 등으로급상승했다. 당시 키펀치용역 중심에 국내 소프트웨어 총수출액은 75년에 75만 달러, 76년 77만에 불과했다. 화콤코리아 1개사의 수출액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서현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