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3대 전자관련연구소
새삼스런 말이긴 하지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70년대를 전후해서 우리나라 경제 개발을 이끌었던 지주가 경제개발5개년계획 이었음을 부정할 사람은아무도 없다. 그 위력도 대단해서 특히 3차(72~76년)와 4차(77~81년) 기간동안의 경제개발5개년 계획은 경제는 물론 사회 문화 전반에 이르기까지 거의모든 분야를 통제할 수 있는 법 이상의 것이었다. 정부가 경제개발5개년 계획에 과학기술 정책을 본격적으로 포함시킨 것은 4차 때 부터이다.
3차 계획이 무르익을 즈음 정부는 중동전쟁과 석유 파동을 겪게 되면서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비약적 경제 성장을 가져왔지만 그 반대급부도 만만치 않아 경제의 대외 의존도 심화라는 현상을 통감하던 터였다. 뿐만아니라 계층간·부문간·지역간 불균형 까지 조장함으로써 지속적인 경제성장에 저해 요인이 배태되고 있음도 간파했던 것이다.
4차 계획의 기본 목표가 「자력성장 구조 실현」·「사회개발 촉진」·「기술 혁신과 능률 향상」으로 귀착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같은 목표설정에 따라 과학기술의 개발 촉진은 4차 계획의 핵심과제로 부상하게 된다.
4차 계획에서 과학기술 개발 전략은 크게 「자체 개발」과 「도입 기술의토착화」라는 2가지 방향에서 접근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정부는 당시 거의유일한 국책 종합 연구기관인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의 역할을 재정립하기에 이르른다. 이를테면 기초과학연구 등 기업과 단위연구소가 할수 없는대형 국책 사업은 KIST가 맡고 현장의 당면 과제는 분야별 전문 연구소를 새로 설립,역할 분담체제를 갖춘다는 것이었다.
이때 새로 설립되거나 KIST에서 독립된 연구소들이 한국선박연구소·한국해양개발연구소·한국통신기술연구소(KTRI)·지역개발연구소·한국표준연구소·한국화학연구소·한국핵연료개발공단·한국자원개발연구소·한국기계금속시험연구소·한국전기기기시험연구소·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한국열관리시험연구소 등이다.
이 가운데 컴퓨터·전자통신·반도체등 전자산업 관련된 곳은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한국통신기술연구소(KTRI)·한국전기기시험연구소 등 당시트로이카 불리던 3개 연구소였다. 그러나 이 트로이카 가운데 현재 까지 존치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KIET는 상공부,KTRI는 체신부,한국전기기시험연구소는 동력자원부(당시는상공부)가 각각 출연한 것이었다. 역할분담도 서로 다르도록 했다.그런데 문제는 KIET와 KTRI 및 이들 조직을 배출시킨 KIST와의 관계였다. 77년 3월 이3개 연구소 간에 합의된 역할분담 내용을 보면 KIST는 전자재료와 부품,공정제어계측 등 기초 분야,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는 반도체와 범용 컴퓨터,한국통신기술연구소(KTRI)는 교환·전송·단말등 통신기기를 각각 전담하는것이었다. KIST는 그동안 독점해 온 컴퓨터·통신·반도체 등 80년대 이후전자산업의 핵이 된 분야를 모두 아우 격인 두 연구소에 넘겨 준 것이다.
(다음 기회에 언급하겠지만 4공화국의 연구소 전문화 방침에 의해 KIST 등에서 분리 됐던 KTRI·KIET·한국전기기기시험연구소등 3개 연구소 통폐합을 추진한 5공화국 방침에 따라 84년 현재의 한국전자통신연구소(ETRI)로 재 통합하게 되는 우여 곡절을 겪는다)
70년대 말에 동시에 진행됐던 3개 연구소의 출범 과정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자. 3개 연구소의 출범 상황을 보면 몇가지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할수 있다. 우선 연구소 출범에 대한 법적 근거가 모두 74년부터 발효된「특정연구기관육성법」이라는 점,설립자 역시 모두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점등을 들 수 있다. 출범 시기도 76년 12월 30일로서 모두 같다. 뿐만 아니라출범후 3개 연구소가 모두 4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과학기술 부문 개발을위한 특정 연구 기관으로 지정 됐음은 물론이다.
3개 연구소 가운데 한국통신기술연구소(KTRI)는 전자교환기의 전자교환기의 도입과 개발 사업을 주관하기 위해 76년 KIST부설 한국전자통신연구소(KCRI,현재의 ETRI와는 다르다)라는 이름으로 먼저 발족됐다.
전자교환기의 도입과 개발에 대한 연구는 이미 66년 출범한 한국전기통신연구소(81년에 출범하게 되는 KETRI와는 다르다)에 의해 추진돼왔고 72년부터는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도입 대상 교환기들에 대한 성능 상의 장단점이파악된 상황이었다. 74년에는 「전자교환방식 공동연구 추진계획」에 따라한국전기통신연구소 내에 전자교환연구부가 구성되고 교환기도입에 대한 본격 연구가 시작됐다.
그러나 75년 이 연구 사업은 『전자교환기를 국내 기술진으로 개발하라』라는 박정희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중단되고 만다. 이에 따라 국산 전자교환기 개발을 담당할 새로운 연구소 건립이 추진되는데 이때 발족된 것이 KIST부설 한국전자통신연구소이다. 부설연구소장은 KIST 부소장이던 정만영(전삼성반도체통신 부사장)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자통신연구소는 연구소장만 있었지 아무런 준비나 기반이 마련돼 있지 않았다. 이같은 상태의 한국전자통신연구소를 「특정연구기관 육성법」에 의해 77년 12월 인수하고 명칭을 바꿔 산하 특정연구기관으로 탈바꿈 시킨 것이 바로 한국통신기술연구소(KTRI)이다.
KTRI는 77년 12월 10일 서울민사지방법원에서 박정희대통령을 설립자로 하고 출연금 1백만원으로 하는 설립등기가 마쳐짐으로써 정식 출범하게 된다.
초대소장은 정만영이 그대로 이어 받았고 조직의 핵심인 제1연구담당(전송부문) 부소장에는 김종련(현 데이콤 자문위원),제2연구담당(교환부문)부소장에는 안병성(현 한국정보통신연구소 기술역),제3연구담당(특수업무 및 통신시스템부문) 부소장엔 경상현(전 정통부장관)이 각각 임명됐다.
통신기기를 제외한 나머지 전자산업 분야 업체들이 큰 호응을 보냈던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의 출범은 70년대 중반 전자산업 전반에 태동하던 두 갈래의 흐름이 하나로 통합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그갈래의 하나는 정부의 전자공업 육성 정책에 의한 제도적 측면이었고 또 하나는 KIST의 전자 분야 연구진의 기술적 노력의 측면이었다.
제도적 측면의 경우 73년 석유 파동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자 정부는74년 제2차 전자공업 육성책을 발표하는 등 당초 계획의 수정보완에 나서게되는데 이를 계기로 구체화 된 것이 구미 전자공업단지 조성과 한국전자공업진흥회의 출범이다. 정부는 또 전자산업의 핵심인 반도체와 컴퓨터 분야 기술 개발에 지대한 관심을 보여 이미 74년 한국전자기술연구소(가칭)을 등록해 놓고 「특정연구기관육성법」상의 특정 연구기관으로 지정해 놓고 있던터였다.
이런 움직임속에 KIST 측에서는 김만진(재미)과 이용태(현 삼보컴퓨터회장)가 각각 책임자로 있던 부설 반도체기술개발센터와 컴퓨터국산화연구실이정부 의지에 부합하는 각종 연구를 벌여 오고 있었다. 특히 김만진의 노력이돋보였는데 그는 반도체 기술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한편 UNDP(유엔개발기금)등 해외 원조기관에 연구 계획서를 제출,독자적인 자금 확보를 모색키도 했다.
김만진의 이같은 노력이 상공부 전기공업과장 유영준과 청와대 경제수석오원철 등에 수용되면서 비로소 한국전기술연구소의 태동이 시작됐던 것이다한국전자기술연구소는 76년 12월 정부 출연 41억원 등 내자 51억원과 IBRD차관 등 외자 1천1백만 달러를 투입하겠다는 정부 재가를 얻어 구미 전자공업단지에서 정식 출범하게 된다.(전자공업 육성 측면의 출범 비화는 본란 제16회 상공부부상과 한국전자기술연구소 출범 참고)
한편 한국전기기기시험연구소는 출범 당시에는 상공부 산하 특정연구기관이었으나 나중에 전력등 重電 분야를 전담하게 된 점동력자원부로 이관된 곳이다.
발전과 송·배전 등 동력에 관련된 重電산업은 70년대 전반까지만 해도 초보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경제개발계획으로 전기 수요의 급증에 따라 중전기 공업 기반이 확대일로에 있었으나 아직 이를 충당할 기술이나 대규모시험설 등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기업들은 외국에서 기술과 부품을 들여와 제품을 생산하고 이의 시험을 다시 외국 기관에 의존하는실정이었다.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위해서는 이에 대한 해결책 마련이 시급했는데 75년 1월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주최한 상공부장관과의 간담회에서 短絡시험설비의 필요성이 처음 제기됐다. 이어서 전기공업협동조합에서는 75년도 4대 사업의 하나로 시험소 설치를 계획하고 있었다.
이런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는 가운데 76년 2월 전기학회·한국전력공사·한국전기공업협동조합·한국전기협회 등 21개 기관이 상공부에 모여 한국중전기시험소 설치추진위원회를 발족시키게 된다. 이 추진위원회가 실제 추진한 것은 기존 한국전력 부설 한전기술연구소를 상공부 산하 특정연구기관으로 개편하고 연구 인력과 설비도 그대로 활용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계획은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그대로 확정됐고 한국전기기시험연구소는 76년 12일30일 창원 기계공업단지 내에서 추진위원위원장이던 정성계(서울대교수)를초대 소장으로 정식 출범하게 된다.
한국전기기기시험연구소의 업무는 주로 중전기 분야에 대한 각종 시험연구를 비롯 전기 용품의 품질 보증 및 검정 등이었지만 이는 과학기술에 관한제반 시험연구와 지원이 수반되는 것이어서 그 업적은 대단했다.
그러나 한국전기기기시험연구소는 출범 4년만인 80년 12월 한국통신기술연구소(KTRI)와 1차 통합돼 한국전기통신연구소(KETRI)로 다시난다.
<서현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