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특집] 비메모리 간판주자 ASIC

「생산의 90% 수출, 수요의 75% 수입.」

국내 반도체산업의 기형적인 구조를 극명하게 나타내주는 대목이다. 이유는 무엇보다 국내 반도체산업이 D램에 편중돼 있기 때문이다.

세계시장은 물론 국내 반도체시장의 70%를 차지하는 비메모리제품 생산이거의 전무하다는 사실은 생산기반이 그만큼 취약하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이같은 취약성은 거의 5년 넘게 지속된 이상호황에 가려 숨겨져왔다. 그렇다고비메모리 제품의 중요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업계는 물론관계당국도 해가 바뀔 때마다 주문형 반도체(ASIC)산업 육성을 부르짖어왔지만 정작 실천에 옮긴 것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았다. 대부분은그간 상종가를 구가해 온 D램 인기에 파묻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D램가격 폭락에 따른 시장 위축세가 두드러진 최근들어 국내 반도체산업의 취약성은 여지없이 노출되고 있다. 당국은 믿었던 반도체 가격의급락으로 수출전선에 비상이 걸렸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는가 하면 업체들은저마다 매출목표의 하향수정과 함께 감산이라는 고육책을 동원하는 등 불과몇달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D램 등 표준제품이라 할 수 있는 메모리제품은 마구 찍어내면서 마이크로프로세서·컨트롤러·로직류를 비롯 정작 세트업계에서 필요한 반도체의 75% 이상을 수입하는 아이러니는 미국·일본에 이은 「세계 반도체 3위 국가」라는 위상을 무색케하고 있다.』(반도체 공동연구소 박영준 소장) 실제로90년 이후 국내 반도체산업은 일단 D램을 앞세워 양적으로 급팽창해왔으나반도체를 핵심적으로 사용하는 가전·컴퓨터를 비롯한 세트산업은 경쟁력이약화돼 부진을 면치 못했다.

국내 세트산업이 전반적으로 원천기술을 외국에 의존하고 설계능력이 뒤떨어지는 등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같은 상황에 국내 반도체산업의 기형적인 생산구조가 일조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최근들어 비메모리 반도체 중에서도 ASIC 육성이 강조되고 있는 이유도반도체산업 자체의 안정적인 성장을 꾀하자는 취지는 물론 세트산업 발전과의 연계성이 높기 때문이다.

반도체산업협회의 한 관계자도 『ASIC을 육성하지 않고서는 국내 반도체산업의 성장이 한계점에 부닥치게 됨은 물론 가전·컴퓨터·FA를 비롯한 전반적인 산업의 경쟁력을 갖추는 것도 기대하기 어렵다』고 심각성을 지적한다.

ASIC(Application Specific Integrated Circuits)은 흔히 특정 응용분야및 기기를 위해 제작되는 집적회로를 의미하는 말이다. 광의의 개념으로는메모리 및 개별소자를 제외한 비메모리를 총칭하기도 하지만 통상 MOS기술을이용한 특정용도의 주문형 IC를 뜻한다.

ASIC은 고집적·고성능·고신뢰성을 통해 시스템의 개발기간 단축과 원가절감을 가져오며 회로기술을 보호할 수 있는 게 특징이다. 또한 다양한 응용기술로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으며 다품종·소량 생산체계로 중소기업에유리한 측면이 강하다. 이 점이 바로 대기업 중심의 메모리제품과의 큰 차이점으로 꼽힌다.

ASIC은 특히 메모리분야에서 중시되는 반도체 공정기술과 마이크로프로세서 등에서 요구되는 첨단 회로설계 능력이 동시에 필요한 사업분야로 각종시스템의 고속화·소형화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주요 응용분야로는 PC를 비롯한 정보기기분야(54%)·모뎀 등 통신기기분야(24%)·가전 및 산업전자분야(18%)의 순으로 협의의 개념인 MOS ASIC 세계시장 규모만도 지난해 1백38억달러에 이어 올해에는 1백58억달러로 2000년까지매년 평균 15%대의 꾸준한 성장세를 유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ASIC시장도 빠른 속도로 커지고 있다. 시스템의 소형화 및 고성능화,그리고 멀티미디어화 추세가 ASIC시장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 이에따라 국내시장도 지난해 4천억원에서 올해에는 6천억원 수준으로 확대될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이에 반해 국내생산은 절반 수준에 그치는 등 아직도 미흡한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우리나라 ASIC산업이 낙후된 이유는 ASIC산업의 3대 요소로 꼽히는 설계도구·설계인력·제작시설 등의 기반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말하면 ASIC 설계에 필요한 디자인 소프트웨어 및 검증도구의 부족 시스템설계 및 집적회로를 설계할 수 있는 전문인력의 부족 집적회로 제작에 필요한 공정 조립 및 시험분석시설 구축 미비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반도체산업 구조가 대기업 중심의 메모리에 집중돼 다품종 소량생산 및 설계기술 중심의 ASIC산업이 자연스럽게 뒷전으로 밀려난 원인이 크다. 특히 전문 설계업체들의 경우 설계한 ASIC을 칩으로 제작하기 위한 시설(파운더리) 확보가 가장 중요한데 대기업의 반도체라인은 메모리 생산에 묶여있어 사실상 이용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큰 문제였다. 설사 이용한다 해도대기업의 높은 간접비용 등으로 인해 수입품보다 비싸지고 개발기간도 길어생산자나 수요자 모두에게 별 이득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이같은 이유로 중소업체들의 상당수가 국내에 ASIC 생산업체들이 있음에도 아직도 대만·일본·미국 등 외국에 대부분의 생산을 의뢰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대학이나 연구소 등의 ASIC시설들이 있기는 하지만 우선 시설 자체가태부족인데다 여러 측면에서 중소 세트업체들이 의지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국내 반도체 개발이 세트 조립생산의 영향으로 복제설계 내지 보완설계 위주로 발전돼 설계인력 기반이 취약하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또 설계 및검증 소프트웨어 등 설계도구 산업의 미비도 ASIC산업 발전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현재 반도체업계는 설계도구를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고 내부용도의응용도구 정도만 국내에서 개발하는 실정이다. 이에 따라 국내 ASIC 설계전문업체 수는 5∼6개 정도에 그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만의 전문업체수가 50여개에 이르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우리보다 10년 가까이 늦게 반도체산업에 투자하기 시작한 대만은 ASIC부품이 전자산업의 국제경쟁력 제고 및 고부가가치 창출에 핵심이 된다는 것을 간파하고 이 분야에 집중 투자해왔기 때문에 ASIC산업 자체는 물론 시스템 설계능력에서도 우리를 앞서고 있으며 그 결과 PC를 비롯한 여러 산업분야에서 우리를 앞지르고 있다.』(반도체설계교육센터 경종민 소장)

최근들어 ASIC산업에 대한 반도체업계의 인식도 크게 달라지고 있다. 메모리사업에 사활을 걸어온 국내 반도체업체들이 가격급락 등 반도체시장 환경변화에 대응, 집중투자를 통한 ASIC사업 강화에 본격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조립사업에 주력해 온 거평그룹도 ASIC시장 진출을 위한 물밑작업을서두르고 있다. 이들 업체가 비메모리 가운데 ASIC을 전략산업으로 육성키로한 것은 멀티미디어·정보통신기기의 발전으로 주문형 반도체시장이 급성장하고 있는데다 그동안 메모리제품에서 시장을 주도하며 기술적 여건이 성숙된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LG반도체·현대전자·대우전자 등은 각사별로 수천억원에 이르는 대대적인 투자를 통해 올해를 ASIC 육성을 위한 원년으로 삼는다는 방침아래 최근 사업부 조직개편과 함께 초미세 설계기술 확보를 위한연구인력 보강 및 응용시장 특화전략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특히 각종 통신기기분야와 PC 및 멀티미디어 기기, 그리고 HDTV 및 디지털 VCR 등 계열사의주력 세트제품과 연계해 개발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기술추세도급진전되고 있다. 0.6 제품생산 기술확보에 이어 상당수 업체들이 0.5 내지0.35 제품을 개발중이거나 완료단계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보통 메모리보다 한세대 뒤져 발전해 온 ASIC기술이 이제 거의 메모리제품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셈이다. 외국업체들의 움직임도 주목할 만하다. 가전시장을 겨냥한 도시바·히타치 등 일본업체의 약진이 계속되고 있고 통신 및 멀티미디어 관련기기, 그리고 차세대시장으로 부상하고 있는 자동차분야의 선점을 위해 디지털 시그널 프로세스(DSP) 제품을 앞세운 TI코리아를 비롯 LSI로직·SGS-톰슨 등 미국 및 유럽계 업체들도 부지런히 뛰고 있다. 이들 해외업체는저마다 ASIC디자인센터를 개설해 세트의 설계부터 엔지니어링 지원을 통한적극적인 영업방법을 동원해 고객잡기에 나서고 있다.

최근들어 국내 ASIC시장에 눈여겨 봐야 할 또 하나의 변화는 전문 ASIC 설계업체들의 등장이다. C&S테크놀러지·에이직프라자·사이몬 등 젊고 실력있는 전문 설계인력들이 주축이 된 이들 업체의 부상은 ASIC산업 저변확대의적지않은 활력소가 되고 있다. 실제로 이들 전문 설계업체의 본격가동 이후회로설계 기술의 급진전과 함께 그동안 해외로 빠져나갔던 외주물량들이 대거 국내에서 소화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함께 전자통신연구소(ETRI), 반도체공동연구소와 반도체설계교육센터(IDEC) 등 전문기관에서 설계 전문인력 양성을 위한 제도적인 프로그램이 속속 선보이고 있는 것도 국내 ASIC산업의 청신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전문설계인력 육성이야말로 ASIC 기술개발을 앞당기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최근 반도체산업협회와 업계가 공동으로 추진중인 「기술인프라 구축사업」은 ASIC산업 저변확대에 커다란 일조를 할 것으로 전망된다.

『요즘처럼 수요·설계·생산 등 모든 ASIC 환경면에서 인식이 높았던 적이 없었다. 이 시기가 바로 국내 ASIC산업을 한 차원 끌어올릴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반도체산업협회 김치락 부회장)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대학이나 중소기업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프리 파운더리 서비스(Free Foundary Service)」 환경이 마련돼 설계한 시스템을 칩으로 구현, 직접적인 경험을 쌓을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돼야 하며정부차원에서도 회로설계나 반도체 전공자뿐 아니라 시스템 설계자까지 참여하는 대형 프로젝트를 마련, ASIC 기술이 수직적으로 확산될 수 있는 기술인프라의 기반을 제공해야 한다는 게 업계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김경묵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