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초 현대전자와 삼성전자는 앞다퉈 미주투자를 발표해 정부당국을 긴장시켰다. 양사의 투자규모가 무려 각각 10억달러를 넘어서는 초유의 대단위투자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반도체가 「잘 나가는 산업」이라해도 너무하는 것 아니냐는 게 당시 관계당국과 일부업계의 반응이었다. 두 업체가 거의 동시에 이같은 대단위 투자계획을 발표한 것은 경쟁관계가 빚은 무리수라는 지적까지 나오기도했다.
상황이 이렇게 흐르자 재정경제원은 서둘러 업계의 발목을 잡았다. 해외투자의 최대 이점이라 할 수 있는 현지금융 사용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해외 직접투자시 「자기자금 의무조달비율」이라는 규제조항을 신설했다. 주 내용은총 투자금액이 1억달러 이상일 경우 20%를, 1억달러 미만일 경우 10% 이상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규제조치의 명분은 당국의 발표대로라면 첨단산업의 공동화를 야기시킬 수 있는 무분별한 해외투자를 막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명분에도불구하고 업계의 반발은 만만치 않았다.
우선 규제근거가 너무 미약하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규제조항은 재경원의「해외 직접투자 자율화 및 건실화 지침」에 의거한 것이나 이같은 일개 지침이 업계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것은 이를 위반할 경우 추가지급보증 중단등 제재조치를 취한다는 무서운 경고가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같은 규제조치는 좋은 조건의 해외자금보다는 고금리의 국내자금을 강제로 사용케 함으로써 해외로 나가는 것을 무조건 막자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으로, 날로 강화되고 있는 무역장벽에 대응한 업계의국제화 전략에 큰 차질을 가져오는 주 요인이 되고 있다.』(반도체산업협회김치락 부회장)
최근 들어 LG반도체가 역대 최대규모인 19억달러의 웨일스투자를 발표했고히타치와 합작으로 말레이시아 진출도 확정했다. 또 현대·삼성도 미국공장에 이어 유럽 및 동남아 현지공장 계획을 조만간 발표할 예정이다.
반도체산업 특성상 생산·판매의 현지화를 위한 해외투자는 이제 하나의대세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굳이 통상마찰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글로벌 네트워크형 생산·공급체제 구축을 통한 시장선점과 함께 투자리스크 분산을 위해서는 필요한 장소에 유력업체간의 연대가 필수적이라는 분석이다. 거대 기업일지라도 수십억달러를 넘는 반도체투자를 혼자 감당하기는 무리다. 통상반도체는 매출액의 30% 정도가 설비투자로, 10% 정도가 연구개발에 재투자되고 있다. 일례로 1GD램의 경우 MD램과는 달리 투자규모가 1백억달러를 상회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지 합작투자는 이같은 투자리스크를 분산시키면서 안정적인 수요처를 확보할 수도 있는 윈-윈(Win-Win)전략에 적합하다는것이다.
여기에다 우리나라의 경우 취약한 비메모리부문의 기술확보를 위해 기술력있는 외국기업의 인수 또는 지분참여 형태의 합작투자가 불가피하다는 점도해외투자의 당위성을 얘기할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또 해외투자로 인한 국내산업 공동화를 우려하는 일부의 시각과 관련해 업계는 첨단 차세대 제품의 개발 및 생산 본거지는 엄연히 국내에 두고 국내공장증설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다만 수도권 정비계획법 등으로오히려 애를 먹고 있다는 주장이다. 결국 국내 증설을 원천적으로 막아놓고해외진출까지 못하게 하는 것은 어렵사리 높여 놓은 반도체 경쟁력을 저하시키는 근시안적 사고라는 게 업계의 지배적인 시각이다.
『무조건 막는데만 주력할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막는데도 불구하고 봇물처럼 나갈 수밖에 없는 업계의 현실을 파악하고 세계경제 흐름에 걸맞는 보다전향적인 사고를 가져달라』는 게 관계당국에 대한 업계의 한결같은 바람이다.
〈김경묵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