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산업의 태동
오늘날 소형컴퓨터 또는 개인용컴퓨터를 PC라고 부르는 것은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또 PC라는 말이 Personal Computer의 첫자를 딴 약어이기에 앞서81년 8월 IBM이 발표한 「IBM PC」라는 고유 상표명에서 따왔다는 것도 널리알려진 얘기다.
81년 미국 라스베이거스 컴덱스쇼에서 발표된 IBM PC는 인텔의 8비트 마이크프로세서 8080A를 CPU로, 마이크로소프트의 「MS DOS 1.0」을 운용체계로탑재한 것이었다. 오늘날 PC는 대부분 이 IBM PC의 아키텍처 규격을 따르고있고 실제로 소프트웨어적인 호환기능이 제공된다. IBM PC와 호환이 가능한PC를 특별히 IBM호환PC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PC라는 말이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81년부터다. PC라는말이 이렇게 빨리 사용된 것은 뉴스위크와 타임지 같은 주간지, 또는 뉴욕타임스 등 유력 일간지들이 IBM PC 발표기사를 대서 특필했기 때문이다. 이 유력 주간지나 일간지들은 PC가 당시 매우 생소한 단어였지만 IBM이라는 초대규모 공룡기업이 발표한 새로운 컴퓨터라는 점에서 그 장래성을 의심하지는않았다. 그러나 그당시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던 PC라는 말은 IBM PC와는 무관했다.
80년대 초반 국내에서 PC라 불리던 컴퓨터들은 미국 애플의 「애플」 탠디의 「TRS 80」 일본의 아스키와 마이크소프트가 공동개발한 「MSX」 미국 오스본의 「오스본」 국내 삼보전자(현 삼보컴퓨터)의 「SE 8001」 등이었다.
IBM PC가 발표되기 전까지 이들은 모두 마이크로컴퓨터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대개는 인텔의 8080A, 모토롤러의 6800A, 자일로그의 Z-80, 페어차일드의 F-8과 같은 8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가 CPU로 장착돼 있고 주기억기억장치로는 32~6백48 정도의 램(RAM)이 사용됐다.
마이크로컴퓨터라는 개념은 국내에서 두가지로 통했는데 하나는 인텔이나모토롤러의 마이크로프로세서를 CPU로 채용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컴퓨터 성능이나 용량의 크기를 나타내는 등급의 한 단위로였다. 당시통용되던 컴퓨터의 등급에는 대형(메인프레임)·중형·소형·미니컴퓨터와같은 것이 있었는데 마이크로컴퓨터는 미니컴퓨터 다음으로 최하위 기종을뜻했다. 80년 11월 과기처가 마련한 「전자계산조직 도입승인 기준」을 보면등급별 기종을 판매가격(FOB)으로 구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대형은 70만달러 이상, 중형은 30만달러 이상, 소형은 10만달러 이상, 미니컴퓨터는 2만달러 이상, 마이크로컴퓨터는 2만달러 미만의 컴퓨터로 정의하고 있다.
마이크로컴퓨터, 아니 PC는 애플 등 외국제품이 3백만∼4백만원을 호가,지금의 펜티엄급 PC보다 훨씬 비쌌고 국산인 삼보전자의 SE 8001도 2백만50만원을 넘었다. 당연히 일반인보다는 교수, 연구원 등 특수 계층이 주된 사용자였다.
PC의 공급은 유일한 국산제품을 생산하고 있던 삼보전자를 비롯, 애플의국내 총대리점 한국소프트웨어(뒤에 삼보컴퓨터에 흡수)와 국내 최초의 바이트숍(BYTE Shop) 방식의 공급체계를 지향했던 엘렉스(뒤에 한국소프트웨어와함께 삼보컴퓨터에 흡수) 등이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엘렉스가 도입한 바이트숍은 많은 개발 및 지원 인력체제가 필요한 기존 메인프레임 공급방식과는 달리 가전제품처럼 거리의 상점에서 컴퓨터를 판매한다는개념으로 엄청난 파문을 불렀다. 75년 미국에서 처음 출현한 바이트숍은 77년 출범한 래디오 샥이나 컴퓨터랜드와 같은 프랜차이즈(연쇄점)형태로 발전했고 80년대들어서는 PC 산업의 폭발적 확대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삼보전자와 엘렉스 외에 PC의 공급에 가세한 업체들은 초창기 청계천 컴퓨터상가를 일구어 낸 희망전자,홍익컴퓨터,로얄컴퓨터,에이스컴퓨터,골든벨,한국마이컴,브레인컴퓨터,석영전자 등 이른바 조립PC 제 1세대들이었다. 이들은 오디오 조립키트가 판을 치던 청계천 상가 3층에 바이트숍 형태의 소규모 점포를 내고 6800A와 Z-80기반의 본체만을 조립,저가로 공급함으로써 특히 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모았다. 제1세대 조립업체들이 공급한 제품은 주로6800A 기반의 애플II 복제품이었다. 이들은 마이크로프로세서·주기판·플로피디스크드라이브·카세트 레코더·입출력용 인터페이스·모니터 등을 대만등에서 개별적으로 구입해서 지적재산권이 엄연했던 제품을 그대로 복제,공급함으로써 짭짭한 재미를 보았던 것이다.
삼보전자나 청계천 조립 제1세대... 물론 이런 상황만을 놓고 우리나라 PC산업의 태동을 이야기할 수는 없을 터이다.
우선 당시 대부분의 회사들이 주식회사의 형태를 취하고 있기는 했으나 자본금 1천만원 미만에 종업원도 서너명 수준인 초미니 기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또 조립PC 제1세대들도 대부분 종업원 1-2명을 거느린 점포단위개인 기업 수준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들 기업이 구멍가게 수준을 벗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PC가 너무 비싸 시장 수준의 수요가 형성되지 못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82년 까지 국내에 공급된 PC는 모두 합쳐 1천여 대가 채 되지 못했다. 중대형급 컴퓨터를 외국에서 들여와 국내공급하던 삼성전자·금성사·대한전선 등대기업들이 PC시장에 뛰어들고 싶어도 뛰어들 수 없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상황이 이쯤되자 81년 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정부내 일각에서는 전자공업육성책의 하나로서 PC산업 활성화 대책이 관계 부처별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주역들은 정보산업 분야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정책 경쟁을 벌여온과기처와 상공부였다.
82년 2월 과기처가 먼저 정부 예산 10억원을 투자해서 82년말 까지 실업계고등학교 등에 5천여대의 PC를 공급하겠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교육용컴퓨터공급계획을 전격 발표했다. 이발표는 업계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연간 시장 규모가 5백대도 않됐던 상황에서 5천 대의 수요가 발생한다는 것은누가봐도 엄청난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 계획은 82년 2월18일 있었던 부처별 새해 업무보고에서 이정오 과기처장관이 대통령에게 보고한 내용 그대로 였다. 이 계획은 당시 과기처 정보계획국장 신만교가 주도해서 작성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해의 과기처 업무보고는 다른 부처의 여느 것과 마찬가지로 새정부 출범후 첫번째로 치뤄졌다는점에서 다소 과장이 있더라도 현시적인 내용이 들어갈 필요가 있었다. 이를테면 도전적인 성격의 신임 대통령에게 뭔가 한건을 터트려 줘야 할 판이었는데 그것이 바로 5천대 교육용컴퓨터 공급 계획이었던 셈이다. 신만교와 함께 이 계획을 작성한 당시 Q씨의 회고.
『그러나 이 계획은 준비 기간이 너무 짧았던 데다 작성에 필요한 사전 조사는 물론이거니와 문교부·상공부 등 관계 부처간에도 충분한 협조가 이루어지지 못한채 발표되고 말았죠. 공급 완료시기를 그해 연말로 잡아 놓고도공급 대상 기종 규격이나 조달 방법 등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던것이 그 단적인 옙니다. 이를테면 연두보고 시기에 맞추느라 대상기종을 컴퓨터 개발전문 국책연구소인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를 통해 새로 개발할것인가, 아니면 기존 민간업체들이 생산하는 모델을 사들일 것인가 조차도고려하지 못했던 것이죠.』
아뭏튼 이 엄청난 양의 PC를 어떤 루트를 통해 확보하느냐가 가장 큰 관건이었다. 과기처는 결국 대통령에게 보고한지 3개 월만인 82년 5월 상공부의협조를 얻어 산하 KIET를 통해 교육용 컴퓨터를 새로 개발할 민간업체 선정에 나서게 된다. 또 각급 학교에 대한 공급시기도 1년이나 늦어진 83년말에야 완료됐고 이에 앞서 정부 조달 가격 결정을 놓고도 한바탕 홍역을 치루게된다.(개발업체 선정과 공급에 관해서는 다음호에서 언급키로 한다)
과기처가 KIET를 통해 교육용 공급업체 선정에 나설 즈음인 그해 5월 상공부는 「전자계산기 산업 육성을 위한 전문업체 선정요강」이라는 것을 발표했다. 컴퓨터 생산업체를 유형별 부품별로 전문화한다는 것과 이 요 강에 따라 선정된 업체들은 시설·운전·기술개발 등 각종 자금을 우선적으로 지원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상공부의 생각은 마이크로컴퓨터·마이크프로세서·플로피디스크드라이브등 PC관련 분야와 32비트급 미니컴퓨터 등을 개발할 업체를 분야별로 2-3개를 선정,제한경쟁을 통해 국내 컴퓨터산업을 고도화시키겠다는 발상이었다.
상공부의 이같은 계획은 파괴력면에서 과기처의 교육용컴퓨터공급 계획 발표를 능가했고 기업들의 관심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요강 발표 한달만인6월10 일 마감까지 전문업체 선정 신청업체수와 신청부문은 무려 87개사 1백94개 분야에 이르렀다. 그러나 「전자계산기 산업 육성을 위한 전문업체선정요강」에 의한 분야별 업체 선정은 5공화국이 끝날 때까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과기처와 상공부의 발표문들은 시행상에 적지 않은 문제점들이 노정되기는했지만 국내 컴퓨터업체들로 하여금 PC산업에 눈뜨게 하는 직접적인 계가가돼줬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과기처의 교육컴퓨터 공급계획의 경우즉각 파문을 일으켜 삼성전자·대우전자(대한전선의 후신)·금성사·동양나이론 등 대기업들의 참여를 유도해 냈다.
또 상공부의 전문업체 선정요강도 고려씨스템·큐닉스·한국상역·한독·금성반도체·동양정밀·금성통신등 대기업 계열 또는 중견업체들의 PC본체관련부품 개발에 즉각 나서게 하는 효과를 거뒀던 것이다.
<서현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