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계·학계·관계기관의 대표가 모인 이번 「반도체 민·관 협력회의」는무엇보다 현 위기상황의 타개를 위한 국내 반도체산업의 체질개선에 정부가앞장서겠다는 의지를 공식적으로 밝혔다는 점에서 의미를 둘만하다. 업계는특히 이번 발표내용이 그간 큰일이 생길때마다 발표하는 「땜질식」의 선언적 의미를 넘어 구체적인 정책추진의지를 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박장관은 이날 회의에서 반도체산업의 제2도약을 위한 기본방향으로 메모리분야의 비교우위 유지, 비메모리 집중육성, 장비·재료산업의 확충, 기반기술 개발의 강화를 제시하면서 구체적인 추진방법으로 중장기 로드맵을 통한 기술인프라 구축을 강조했다.
이는 그간 진단만 있고 처방은 소홀히 해왔던 관계기관의 태도와는 커다란차이를 보이는 대목이다. 실제로 비메모리 육성책 등은 이미 여러차례 지적돼온 사항들이다. 그러나 메모리 호황에 파묻혀 구체적인 대책없이 일회성구호로 끝나왔다. 생산능력 확대 등과 같이 단기간의 대단위 투자로 판가름나는 메모리 육성과는 달리 전문인력과 기초기반기술 확보가 필수적인 비메모리분야는 단기적인 처방으로 육성키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바로 이같은 근본적인 차이가 국내 반도체산업이 이제까지 메모리에만 매달려 「절름발이식」 발전을 해올 수밖에 없는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세계반도체시장에서 차지하는 메모리비중은 30%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70% 이상은 여전히 비메모리제품이 주도하고 있다. 시장안전성면에서도 메모리제품은 극히 불투명하다. 이는 올초 시작된 가격급락으로 D램이 종전보다 거의 5분의 1수준으로 폭락한 사례에서도 여실히 증명되고 있다.
이날 박장관을 포함한 업계·학계 관계자들 모두가 한결같이 비메모리 육성을 더 이상 미룰 수 없고 이를 위해서는 기반기술개발 강화 등 체질개선이필수적이라고 강조한 것도 이같은 인식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대책이다. 이날 난상토론식으로 벌어진 경쟁력 제고방안도 결국 이를 「어떻게」 추진할 것인가에 모아졌다. 『제품 생산구조 및 기초기반기술에서 미·일 선진국에 뒤져 있는만큼 이를 늦게나마 따라잡기 위해서는 대학의 연구능력 강화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와 연구의 효율성 제고를 위한 인적·물적 자원의 공유시스템 구축 등에 대한 관계기관의 지원이 시급하다.』(박영준 반도체연구소장)
『무선통신과 관련한 반도체 기술이 전무하다. ASIC 등 비메모리사업 강화를 위해서는 시스템기술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에 대응하는 시스템사업 육성방안도 병행돼야 한다.』(연세대 이문기 교수)
업계의 요구도 전에 볼 수 없이 직선적이었다. 현대 김주용 사장을 비롯해LG 문정환 부회장, 삼성 이윤우 사장은 한결같이 공장 신·증설 및 관세,해 외투자, R&D투자를 위한 상업차관 허용문제 등 그간 업계의 애로사항들을강도높게 토로하는 한편 장기적인 안목에서 기술인프라 구축에 정부가 앞장서 줄 것으로 요구했다.
이같은 업계와 학계의 지적에 대한 답변형식으로 이루어진 통상산업부의대안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끈 대목은 기술인프라 구축부분. 국내 반도체산업기술환경에 적합한 기술로드맵를 마련, 향후 10년간 반도체 원천기술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겠다는 박장관의 발표는 일단 국내 반도체산업의 문제점을 제대로 직시한 대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산·학·연 역할분담을 이루고 그 역할과 맞는 지원체제를 갖춰 나가겠다는 통산부의 기술인프라 추진방향은 그간 일회성 내지 구호성에 그쳐왔던 단기 처방으로 치유되기 어려운 국내 반도체산업의 체질개선의 특효약이라는게 전문가들의 지배적인 시각이다.
일단 방향은 제대로 잡은 만큼 이제 실천의지만이 숙제로 남은 셈이다.
〈김경묵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