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표준화사업 실패로 끝난다
우리나라 컴퓨터 도입역사에서 70년대는 정부와 업계 모두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왔던 시기였다. 어떻게든 컴퓨터를 많이 도입해서 업무의 전산화를확대하는 것이 급선무였던 것이다. 또 컴퓨터 하드웨어를 국산화 하여 수출전략품목으로 육성하겠다는 의지에 불타기도 했다.
물론 하드웨어의 국산화 열기는 과기처·상공부·체신부 등 당시 관련 3부처가 벌였던 정보산업 정책 주도권 싸움의 핵으로 부상하면서 80년대에 들어서면서도 계속된 현상이었다. 이 싸움이 가능 했던 것은 지금과 달리 국산화라는 것이 정부 정책이나 입김이 있어야만 추진할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업계는 정부가 끌어 주는데로 앞만보고 달리면 되는 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컴퓨터보급이 급속하게 확대되는 80년대 들어서면서 정부와업계는 앞쪽 뿐아니라 옆과 뒤도 함께 돌아다보아야 할 여러 <의무>를 느끼기 시작한다. 이 <의무> 가운데 하나가 수십여종이 난립해 있던 한글코드나 키보드 자판배열의 통일 등 컴퓨터 분야 표준화작업이었다.
컴퓨터 분야의 표준화 <의무>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인 한글과 한자를컴퓨터에 제대로 적용하려는 일단의 노력이기도 했다.
특히 관심을 모았던 한글코드의 통일은 이를테면 기본적으로 키보드에서한글을 입력해서 모니터나 프린터에 그대로 출력돼 나오도록 하는 컴퓨터 부호처리 체계를 국가차원에서 표준화하갰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글코드는 그러나 이처럼 단순한 작업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나아가서는 워드프로세서 등 응용프로그램에서 한글로 된 데이터를 작성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고 데이터베이스의 검색이나 정렬(소팅)시 한글 가나다순 처리가 가능해야 했다.
이같은 원칙을 기반으로 하는 정부 표준 한글코드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74년 9월이다. 과기처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통해 만든 이 코드는 자소(초·중·종성의 단위)의 값을 7비트로 규정하는 <7비트N바이트>방식으로서 글자 하나의 값을 통털어 2바이트(16비트)로 규정하고 있는 오늘날의표준코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7비트N바이트> 한글코드는 컴퓨터 보급이 활성화되지 못한데다 공급회사도 몇손가락에 꼽을 만큼 적은 상황에서 업계나 사용자 의견을 들어 볼 틈도 없이 정부가 일방적으로 제정한 것이었다. 한자코드에 대한 규정도 없었던데다 문제점도 적지 않게 노출됐다. 결국 컴퓨터 공급회사들이 아전인수격으로 만든 수십여종의 자체 코드가 범람하게 됐고 기종간 호환성은 물론이고한글의 과학적 특성이 철저히 무시돼 처리효율이 크게 떨어질 수 밖에 없는상황이었다.
키보드배열 역시 자판에 기본적으로 수용하는 한글자모의 갯수나 배열순이공급업체마다 모두 달라 혼선이 극에 달했고 한자코드는 79년에 마련된
상황이 이쯤되자 80년 10월 과기처는 정부기관「단체「업계를 대상으로 「표준화 활용에 관한 의견조사」라는 것을 실시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요식 행위에 불과한 것이었다. 본뜻은 컴퓨터분야 표준화사업을 범가국적인 사업으로 공식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과기처 실무책임자였던 C기정의 회고.
『미국과 일본은 물론이고 대만 등이 컴퓨터산업을 자국의 미래 전략산업으로 꼽아놓고 있던 터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장 기본 환경인 표준화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해 놓고 있었죠. 정부 정책의 효율성은 물론이고 산업 활성화나 컴퓨터 마인드 확산이 매우 불투명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표준화 문제는 누가 혼자 떠든다고 해서 해결되는 간단한 작업이 아니었다는거죠. 범부처 또는 민관을 통털어 어떤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고 본것입니다』
이같은 분위기는 일사천리로 확산돼 마침내 80년 12월29일 과기처·상공부·체신부·문교부·내무부·총무처 등 6개부처를 비롯 업계·학계·연구계·사용자 등이 과기처회의실에서 모여 회의를 열었다. 이날 회의에서 비로소컴퓨터 표준화 사업추진위원회의 구성과 표준화시안 마련을 위한 특별 연구반 설치가 합의 됐다.
컴퓨터 표준화사업추진위원회에는 당시 과기처 정보산업국장 최영환을 위원장으로 관련부처 등에서 책임자급 23명이 위촉됐다. 이 위원회는 표준화사업에 대한 계획수립과 연구반 구성,표준의 시행에 관한 사항 등 정책을 결정하는 최고 실무기구였다.
특별 연구반은 컴퓨터표준화사업추진위원회측과 KIST측간에 있었던 연구용역 계약에 의해 탄생된 일종의 태스크포스팀이었다. 특별 연구반에는 KIST전산개발센터 소장이던 성기수와 이기식을 공동 반장으로 정왕호·박동인·정진욱·변옥환·박명호 등 당시 잘나가던 KIST의 젊고 유능한 연구원들이 대거 참여했다. 연구의 중대성을 감안 각 관련분야의 전문인사들이 연구자문위원에 위촉되기도 했다.
특별 연구반의 활동기간은 81년 5월말부터 82년 1월말까지 8개월 동안이었다. 활동기간동안 특별연구반이 새로운 시안을 마련할 때마다 자문회의가 이를 받아들여 검토했고 추진위원회는 자문회의의 검토 결과를 추인했는 일을반복했다.
구성원 대부분이 실패작으로 끝난 74년판 한글코드 제정에 참여한 경험을갖고 있던터라 특별연구반의 연구 활동은 신중한 편이었다. 첫 과제로 착수한 것은 40여개의 컴퓨터공급회사와 국산화업체에 대한 기초 자료조사였다.
그런데 이 기초 자료조사에서 놀라운 사실이 보고됐다. 한글코드와 키보드배열 종류가 조사 대상 업체수와 같은 40여종이나 되는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문제는 이 40여종의 체계들을 어떻게 하나로 표준화(단일화)하느냐는 것이었는데 추진위원회는 특별연구반의 운신에 대한 폭을 넓혀주기 위한 다음과같은 3가지의 기본원칙을 마련했다.
1.컴퓨터산업의 국제화에 대비하고 국제 표준 규격과 관례를 존중한다. 2.
현행 다수 기종의 사례를 참작하되 표준화 단계에서 적용범위를 구체화 한다.
3.표준화가 미래 기술 발전에 저해요소가 되지않도록 배려한다.
이같은 원칙에 따라 마련된 특별연구반의 한글코드와 한자코드 및 키보드배열 표준 시안은 81년 12월 공청회를 거쳐 82년 1월 과기처에 공식으로 제출됐고 이해 5월 KS표준으로 확정됐다. 결론 부터 말하자면 이 표준가운데키보드 배열 분야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핵심분야 였고 가장 관심이 높았던한글코드와 한자코드 74년판 보다 더 처절한 실패작으로 끝났다. 새로 제정한 코드에 대해 어떤 공급업체들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업체들의 독자의 범람이 이전부더 훨씬 심해져 한글코드체계는 극심한 혼란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혼란은 이미 시안 마련과정에서 부터 예상돼 온 것이었다.
한글코드의 경우 기본 코드로서 기존 74년판 <7비트N바이트>코드를 그대로 유지한채 새롭게 <2바이트(16비트) 조합형>과 <8비트N바이트>코드를보조 코드로 추가한 것에 불과했다. <2바이트조합형>이란 초·중·종성을갖춘 글자 하나의 값을 무조건 16비트로 한 것이고 <8비트N바이트>는 초·중·종성을 구성하는 자소 하나 값을 8비트로 규정한 것이었다. 따라서 <8비트N바이트>는 <7비트N바이트>처럼 종성이 홑자음인가 겹자음인가에 따라 글자 하나의 값이 2바이트에서 4바이트까지 가변될 수 있는 코드체계였다.
새 표준에서는 3개 방식의 코드를 표준 규격으로 병행하자는 것이었는데여기에 업계가 호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보조코드로 추가된 <2바이트조합형>은 당시 최고의 컴퓨터회사였던 한국IBM을 비롯 삼보전자·큐닉스컴퓨터 등이 사용하던 것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를테면 각사 코드체계를 이리 저리 짜깁기한 식이었다.
<8비트N바이트>역시 컨트롤데이터「스페리 등 대형컴퓨터공급사와 애플등에서 사용하던 것을 모은 것이었다. 각자 조금씩만만 노력하면 표준코드체계로 들어올수도 있었지만 실제 각공급사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기존 독자코드체계를 고수했다. 상황이 이랬으니 <7비트 2바이트완성형>와 <3바이트>등 표준체계에 끼이지 못한 코드를 사용하던 공급사들의 입장이란 불보듯 뻔했다.
물론 당시 컴퓨터공급사들은 굳이 정부가 마련한 표준에 따를 필요가 없었다. 이를테면 87년에 개정된
한자코드의 상황도 비슷했는데 과기처는 결국 3년뒤인 85년 다시 KIST로하여금 한글코드와 한자코드를 통합하는 새로운 표준 한글코드 제정을 요청하게 된다. 정부의 컴퓨터분야 표준화 사업이 또다시 실패를 인정하고 만 셈이다.
그러나 82년의 표준화 사업은 비록 실패했지만 남다른 의미도 함께 던져줬다. 사상 처음으로 국가적 사업이라는 인식속에서 컴퓨터 표준화사업이 추진됐다는 점과 한글처리의 중요성이 이 사업을 계기로 확산되기 시작했다는 점등이 바로 그것이다.
<서현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