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우리글 정보처리 권고안, 통일시대의 전주곡 되기를

남북한과 중국의 우리글 학자와 컴퓨터 전문가들이 참가한 「96 코리안 컴퓨터처리국제학술대회」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가 도출됐다.

지난 94년 첫 회의를 시작으로 올해 3회째 열린 이번 회의에서 3곳 참가자들은 지난해 2회 대회에서 잠정 합의한 컴퓨터용어·자판배치·우리글 자모순·부호계 등 4개 분야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문을 발표했다.

한국의 국어정보학회와 북한의 조선 과학기술총연맹, 중국의 연변조선족자치주 과학기술협회가 공동 주관한 이번 대회는 정보화시대를 맞아 컴퓨터를 통한 우리글 정보처리의 단일환경 마련하는 실질적인 통로를 제공했다.

이번에 합의된 권고안은 통일시대를 내다보는 진일보한 내용을 담고 있다.

공동안을 바탕으로 표준안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먼저 지난해 대회때 원칙적인 통일합의에 이르러 가장 빠른 진척을 보이고있는 컴퓨터용어 부문은 이번 대회에서 ISO 2382에 기반하는 용어가운데 남북한 표기가 같은 2천1백개를 뽑아냈다.

키보드 배치 공동안을 마련한 것은 최대의 수확으로 평가된다.남북에서 사용되는 자모의 빈도수가 서로 달라 난항이 예상됐던 키보드 배치 부문은 2벌식을 기준으로 총 31자(자음 14, 모음 10, 에, 애, 쌍자음 5개)로 해 자판을공동 설계하기로 했으며 훈민정음상의 고어도 다른 입력모드를 활용해 4자까지 수용한다는 데 합의, 2회 대회 때보다 큰 진전을 보았다. 또 자모 배열순서는 「ㅅ」 다음에 「ㅇ」이 오는 남측안이 그대로 채택됐다.

그러나 구체적인 접근이 어려운 부호계 분야는 현재 남북한과 중국에서 사용되고 있는 2바이트 코드는 그대로 두고 ISO 2022(아스키 확장코드 규격)에따르는 1바이트 코드를 새로 만들기로 해 지난해에 이어 이번에도 별 진전이없었다.

이밖에 음성인식·자동번역 등 최근들어 개발성과가 나타나고 있는 첨단언어문자처리 과제도 선정해 연구하기로 해 일단은 통일시대에 대비한 우리글 컴퓨터화의 미래 지향적인 발판을 마련했다.

언어는 관습의 산물이라고 한다. 언어가 인간의 기본적인 지각의 범주와인식의 작용을 일정하게 반영하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은 「한글」이라는 독창적인 언어를 갖고 있다는 게 큰 자랑다. 그러나 남북한과 중국 조선족은오랜 격리에서 오는 언어적 괴리현상으로 의식의 균열이 생긴 게 사실이다.

그 결과 서로를 보듬기보다는 밀쳐냈고 이해와 공감을 얻기보다는 배제와 증오를 키워 왔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어적 관습의 단절이 민족정신을 이질화시킨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남과 북에 만연된 의식의 병리현상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신의 인화지인 언어를 통일시켜야 한다. 중국 장춘에서 지난 7일 막을 내린 「코리안언어학자 국제학술회의」에서 남북 양쪽이 맞춤법·띄어쓰기·문장부호 등의어문 규범을 더 이상 일방적으로 고치지 않기로 합의한 것도 일종의 「남북언어 이질화」를 막아보겠다는 공감대의 산물이다.

그러나 남북 언어처리 통일을 위해서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어느한쪽이 자기 논리를 포기하고 다른 쪽의 논리를 선뜻 따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술 밥에 배 부를 수는 없다. 이제 우리글 컴퓨화의 기초를 다진셈이다. 부호계를 비롯해 양측이 이견을 보이고 있는 부문은 상호 존중의 틀이 깨지지 않는 선에서 차근차근 접근해 가면 통일한국의 언어 정보화에 획을 그을 수 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번에 순수 민간차원에서 우리글의 컴퓨터처리 권고안을 마련한 것은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언어공동체적 관점에서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시키는중요한 단초를 마련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멀티미디어 같은 혁신매체가언어의 통로를 형성하는 정보사회에서는 한글의 컴퓨터화와 컴퓨터의 한글화가 통일기반을 구축하는 데 더없이 중요하다. 통일한국의 言衆들은 정보사회에서도 한글의 원래적 기능이 훼손되지 않는 방향으로 표준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