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특집] 소형가전산업...외산 잠식에 존립마저 위협

세계무역기구(WTO)출범, 유통시장 개방, 엔저 현상으로 인한 수출 경쟁력하락, 지난해 말부터 시작된 경기 침체 등으로 국내 산업 전체가 어려움에처한 가운데 우리나라 소형가전 산업이 위기를 맞고 있다.

약 1조2천억원 규모에 달하는 국내 소형가전 산업이 한국에 진출한 외국업체들과 힘겨운 시장경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소형가전 시장은 현재 침체기에 있는 냉장고, TV, VCR 등 대형가전 시장에비해 비교적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94년부터 1조원 규모로 성장하기시작해 해마다 10% 내외의 소폭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품목도 전기보온밥솥, 전기면도기, 전기다리미, 헤어드라이어 등 40여 가지에 달하며 대부분우리의 실생활에서 긴요하게 쓰이는 것들이다.

그러나 국내 소형가전 제조업체들은 약 5백개 가량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있지만 대다수가 영세한 중소기업들로 이루어져 있는 실정이다.

이들은 대부분 상표 인지도가 낮은 중저가 제품을 생산하거나 대기업으로부터 하청받아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방식으로 근근이 기업을 유지하고 있다.

국내 가전산업을 대표하는 삼성전자, LG전자, 대우전자 등 가전3사 역시소형가전제품을 중소업체들로부터 OEM을 통해 조달받아 자사 대리점에 보급,구색상품 정도로 취급하고 있으며 신기술이나 연구개발(R&D)투자 등에 소홀히 해왔다.

국내 소형가전산업이 침체된 것은 이처럼 그동안 국내 가전산업이 TV, 냉장고, 세탁기 등 대형가전제품 위주로 발전돼 온 탓에 상대적으로 소형가전산업에 대한 기술개발 및 설비투자가 부진했기 때문이다.

이는 국내 업체들이 최근들어 외국 업체들과의 경쟁에서 뒤지고 있는 결정적 원인이 되기도한다.

과거엔 수입선다변화제도 등 여러가지 정부의 보호정책 덕분에 국내 소형가전 산업이 그나마 명맥을 유지해 왔으나 최근 국경없는 무역전쟁이 본격화하면서 외국 업체들이 잇따라 국내 시장에 진출, 거센 외풍에 시달리게 된것이다.

현재 국내에 진출한 외국 기업들은 필립스, 브라운, 내쇼날 등 이름만 들어도 쉽게 알 수 있는 세계적 브랜드를 가진 회사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최근엔 중국 및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중저가 제품을 생산하는 업체들까지 포함돼 국내 가전시장은 외국 업체들의 각축장이 되고 있다.

외국 업체들의 국내시장 진출 품목 및 이들이 시장에서 차지하는 점유율도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이미 전기면도기 시장은 국내 업체들보다 다국적 기업들의 제품이 더 많이팔리고 있으며 최근엔 국내 시장을 놓고 필립스, 내쇼날, 브라운 등 다국적기업들끼리 시장쟁탈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 마저 발생하게 됐다.

커피메이커 시장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식생활 문화가 점차 서구식으로 변해감에 따라 커피메이커 수요도 급증했으나 이를 흡수해 간 것은거의 다국적 기업들이다.

실생활에서 필수적인 전기다리미도 외제가 판을 치고 있으며 지난해부터는이들이 헤어드라이어 시장도 넘보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최근엔 히타치, 산요, 샤프 등 일본 업체들을 중심으로 국내 전기보온밥솥 시장을 노리고 있어 국내 업체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이같은 상황은 최근 발표된 정부 자료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통산부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커피메이커시장은 8백억원 규모를 형성했는데 그 가운데 수입제품이 약 94%인 7백50억원 어치를 차지, 국내에서 사용되고 있는 커피메이커의 대다수가 수입제품인 것으로 나타났다.

빵굽는 기계인 전기토스터 역시 외산이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3백억원 규모의 내수시장에서 수입품이 2백50억원을 차지하고 있으며 나머지 50억원은국산 제품이 차지하고 있다.

연간 5백억원 규모의 전기면도기 시장도 상황은 비슷해 수입제품이 전체의70%인 3백50억원을 차지하고 있어 국내 제조업체들의 힘든 상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밖에 전기다리미 시장은 약 4백50억원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수입제품이 3백40억원을 차지하고 있으며 국내 업체들은 2백90억원 어치의 제품을 생산, 1백10억원 어치만 내수로 판매하고 나머지는 수출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약 1조2천억원의 국내 소형가전 시장 가운데 외산제품이 차지하는 점유율은 45.3%인 5천4백40억원 가까이 된다. 이는 지난해말 수치로,올 연말에는 50%를 넘어설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국내 소형가전 시장을 외국업체들에게 빼앗길 우려가 높아짐에 따라 최근정부 및 대기업 뿐만 아니라 중소업체들까지 발벗고 나서 대책마련에 분주하다.

우선 정부는 지난해 공업기반기술개발 지원을 위해 정부 3억원, 업체 3억원 등 6억원을 조성한 뒤 전기밥솥 기술개발을 위해 지원했다. 올해엔 가정용 음식찌꺼기 처리기, 전기면도기, 커피메이커, 세제 절감형 세척기기 등 4개 과제를 지원하기 위해 개발업체를 선정하고 있다.

또 정부는 산업기반기금 지원의 하나로 올해 생산성 향상자금 5억원을 노후시설 교체 및 제품개발에 지원할 예정이며 내년엔 1백억원을 지원키로 하고 예산을 신청한 상태다.

이와함께 정부는 최근 수입급증으로 국내 산업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고있는 전기면도기에 대한 덤핑조사에 들어가 덤핑혐의가 인정될 경우 반덤핑관세를 부과할 방침이다.

정부 뿐만 아니라 대기업들도 소형가전 산업 살리기에 적극 나서고 있다.

LG전자, 삼성전자 등은 제품을 공급하는 협력업체들에 대한 품질관리 강화, 디자인개선, 소형가전 담당조직 개편 등을 통해 소형가전 사업을 강화하고 있다.

대우전자는 소형가전 제품개발을 위한 자체 연구소를 운영하는 한편 협력업체들에 핵심기술과 디자인 개발을 지원할 방침이다. 91년부터 소형가전 사업에 참여한 동양매직도 품질 향상과 차별화된 제품개발 등을 통해 내수시장지키기에 노력하고 있다.

중소 업체들도 외산 제품에 대응한 전략 마련에 분주하다.

전기면도기 제조업체들은 수입제품에 맞서기 위해 부품 공동생산, 디자인개선, 협의회 구성 등을 추진하고 있으며 남대문, 청계천, 용산 전자상가 등주요 판매지역에 공동 AS센터를 설립하는 것도 검토중이다.

전기다리미 제조업체들도 국내 시장 보호 및 해외시장 개척을 추진하기 위한 준비위원회를 발족한 상태이며 전기보온밥솥 제조업체들 역시 협의회를구성, 공동으로 일제 전기보온밥솥의 한국내 진출을 저지하고 있다. 소형가전업계는 또 장기적으로 공동기술연구소 설립을 추진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같은 정부 및 업계의 노력은 때늦은 감이 있다는 지적이다.

이미 일부 품목에서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외산 제품들이 시장을 장악한 상태이며 해가 갈수록 타 품목으로의 확산되는데 가속도가 붙을 것으로보고 있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전기면도기, 커피메이커, 전기다리미 등의 시장은 이미 외국업체들에게 빼앗긴 것으로 보고 있으며 헤어드라이어, 전기토스터 등에 대해서도 외국업체들이 한국 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중국 및 동남아산 저가 제품을 수입하는 중소 무역업체들도 달마다증가하고 있으며 최근엔 일본 산요, 히타치, 샤프 등의 업체도 직간접적인방법을 통해 국내 가전시장 침투에 본격 참여를 선언했다.

외국 업체들의 진출이 이처럼 가속화하면서 국내 제조기반도 빠르게 허물어지고 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20여개에 달했던 커피메이커 제조업체들이 최근 2∼3개 업체로 줄어들었으며 전기면도기 제조업체들도 20여개에서 7개로 줄었다. 전기다리미 제조업체들도 10개 미만으로 줄어들었고 나머지 업체들은 문을닫거나 업종을 전환한 상태다.

업계 관계자들은 이처럼 국내 생산기반이 갈수록 약화되는데 과연 정부의지원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먹혀 들지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신제품 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업체들은 정부지원으로 자금압박에서벗어날 것이라며 긍정적으로 보고 있지만 정부의 지원이 국내 소형가전 산업을 살리기에는 너무 취약한 규모여서 실제 혜택을 받게 될 업체들은 소수에불과하다는 의견이다.

정부의 지원책이 체계성과 장기적인 비전이 부족한 것도 문제지만 보다 큰문제는 업계 내부에 있다.가전3사를 비롯해 국내에서 소형가전 사업을 하고있는 업체들은 그동안 소비자들의 요구를 무시한 채 일방적인 제품개발 및마케팅을 해왔다. 소비자들이 원하는 더 싸고 세련된 제품보다는 이윤이 많이 남는 제품, 외국 제품을 어설프게 모방한 제품 등을 개발해 왔으며 애프터서비스도 등한시해 소비자들로부터 불만을 사 왔다.

특히 대형가전제품에 비해 값이 싼 소형가전 제품에 있어서 디자인은 생명과도 같은 것인데 대기업을 제외한 대다수 업체들은 한 두명 정도의 디자이너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거나 아예 디자이너도 없이 제품개발을 추진하는 사례까지 있어 소비자들이 제품을 외면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밖에 국내 중소업체 관계자들이 지적하는 또 하나의 문제는 소비자들의의식이다. 최근 소비수준 향상으로 비싼 외제품을 찾는 소비자들이 갈수록늘고 있는데다 자기만의 멋과 개성을 위해 수입품을 선호하는 신세대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반영하듯 국내 유명 백화점에선 외산 소형가전 제품을 경쟁적으로 전시, 판매하고 있으며 국산품은 가전3사 상표를 단 일부 제품 외에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소형가전 산업은 외국 업체들의 거센 공격과 열악한 기업환경 등으로 존립기반 마저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우리소형가전 산업을 살리기 위해선 이제라도 정부와 기업, 소비자들이 합심해해결책을 마련해야 하겠다.

<윤휘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