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14주년특집] 전자산업 대변혁-규제 빗장풀린 유통시장

올해부터 유통시장이 완전 개방됐다. 이미 예고된 일이었지만 국내업계는적지 않은 불안감과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통상압력에 의한 시장개방일지라도 언젠가는 빗장을 풀어야 할 문이었다.

94년 이후 국내 유통업계는 보이지 않게 유통시장 개방에 대한 일련의 준비를 해왔다. 지금껏 두터운 정부의 보호망 아래 「씨뿌리면 거둔다」는 안일한 유통방식을 취해온 것이 업계의 체질이었다. 기껏해야 우리업체끼리의영역싸움이 고작이었다.

유통시장이라는 밭에 힘들여 호미질을 한 적도 없고 크게 노력을 기울이려하지도 않았다. 특히 가전유통의 경우 제조업체가 유통망을 손아귀에 넣은상태에선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상황은 바뀌었다. 소위 신업태라는 할인양판점의 대두는 안일한 국내 전자유통에 경종을 가하는 대사건이었다. 유통의 최대 장점은 역시 가격이라는 점도 새삼 부각된 일이었다.

신세계백화점이 미국의 「프라이스클럽」과 제휴해 처음 문을 연 「프라이스클럽」은 개장 초부터 소비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물론 생활소비재가 주종을 이루었지만 소형 가전으로부터 시작한 가전판매 역시 무시못할 기세로 기존의 유통질서를 흔들어 댔다.

이후 뉴코아백화점이 개장한 「킴스클럽」이 탄생하면서 가격파괴점인 창고형 회원제 할인매장의 인기는 파죽지세였다. 이어 그랜드백화점의 「G마트」가 생겼고 롯데백화점이 운영하는 「L마트」도 생겨났다.

컴퓨터 전문할인점인 「C마트」도 이 대열에 가세했다.

기존 대리점 유통망을 가진 가전3사도 이에 맞대응했다. 물가는 상승함에도 불구하고 전격적인 가전제품 가격인하라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 겉모양이야 어떻든 점차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는 신유통으로부터 기존 유통망을조금이나마 보호하자는 「맞불작전」의 의미도 적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유통업체와 제조업체간의 힘겨루기도 만만치 않았다.

올해 초 킴스클럽과 삼성전자의 힘대결은 볼 만한 사건이었다. 박리다매를원칙으로 하는 킴스클럽과 2천여 자사 대리점을 보호하려는 삼성전자가 소비자가격을 두고 벌인 싸움이었다. 결국 승자가 없는 싸움이 되고 말았지만 삼성이라는 골리앗에 도전한 다윗과 같은 유통업체의 기세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이와 같은 사건으로 말미암아 「가격파괴」라는 신조어가 거리낌없이 사용되게 되었다. 또 권장소비자가격이란 「얼마나 더 싸게 살 수 있느냐」 또는「얼마나 더 싸게 팔 수 있느냐」의 기준정도로만 작용하게 됐다. 이른바 「유통주도권시대」의 서막이 열렸다. 여기에 「마크로」 「까르푸」 등 외국유통사의 국내시장 진출도 「유통주권시대」를 여는 촉매역할을 톡톡히 했다.

또하나 「96년 유통의 대변혁」이라면 당연히 통신판매시장의 확장을 빼놓을 수 없다. 고작 DM, 카탈로그 판매가 통신판매의 전부로 알려져 온 국내시장에 PC통신판매는 혁신이었다. 세계를 하나로 묶는 컴퓨터 네트워크(인터넷)의 보급은 유통혁명 그 자체였다.

업체마다 앞다퉈 인터넷 판매를 서둘렀고 국경없는 시장은 컴퓨터 화상을통해 안방으로 전달됐다.

그러나 통신판매의 신기원을 이룩한 것은 무엇보다 케이블TV 홈쇼핑채널의본격적인 등장이었다. 국내 홈쇼핑시장의 올해 전망치는 5천억원 규모. 매년30% 이상의 신장을 거듭한다면 2000년에는 전체시장의 3∼4%를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통신판매가 뿌리내린 미국, 유럽 등 선진국이 시장점유율 5%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번개같은 속도로 시장을 점유하고 있는 것이다.

홈쇼핑텔레비전과 하이쇼핑이라는 양대 채널은 올해도 활발한 영업활동을벌여 만만찮은 매출을 올리고 있다. 특히 이들 홈쇼핑채널 역시 중간유통단계를 생략한 「저가」라는 무기로 안방시장을 무섭게 파고들고 있다.

또 현재 1백만가구 정도가 케이블TV에 가입해 있고 앞으로 가입자는 계속늘어나는 추세여서 향후 시장전망 또한 매우 밝다. 양대 채널이 아직은 투자단계에 있어 넉넉한 흑자로 돌아서지는 못했지만 2∼3년 안에 흑자반전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통신판매는 멀티미디어의 발달과 더불어 성장하는 유통산업으로 올해 유독 급성장하는 면을 보이고 있다. 경기가 전반적인 침체에 허덕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공략을 위한 투자에 서슴지 않고 있는 것이 요즘 유통산업의 현주소이다. 반전한다면 그만큼 앞으로 성장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이다. 「성장가능성 0순위 산업」으로 일컬어지는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다.

올해 유통환경 변화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첫째, 가격파괴에 따른 기존 유통체제의 붕괴위험과 신업태의 약진이다. 둘째, 저가와 편안한 쇼핑을 추구하는 케이블TV 홈쇼핑시장의 정착으로 영역이 확장된 통신판매의 자리매김이다. 이 두가지는 앞으로 국내 유통환경 변화의 주인공으로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경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