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전국체전과 88올림픽 전산시스템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은 우리 컴퓨터 역사에서도 하나의 획을 긋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누구도 성공을 자신하지 못했던 양대 스포츠 행사의 전산 프로젝트를 통해 우리나라의 컴퓨터산업은 거듭났다. 정보화사회 진행속도에도 엄청난 가속도가 붙었다.
컴퓨터업계에서는 지금도 86아시안게임과 88올릭픽 전산프로젝트를 「단일 프로젝트로는 최대규모」로 친다. 체육계에서도 이 양대 전산 프로젝트의 성공을 「스포츠과학의 새로운 장」이 열린 계기로 여기고 있다.
86 및 88 전산 프로젝트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것은 서울이 올림픽개최지로 결정됐다는 바덴바덴발 뉴스의 생생함이 채 가시지 않은 81년 가을이었다.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사무총장 이원경(전 외무부장관)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AIST)부설 전산개발센터 소장 성기수(현 동명정보대 총장)를 광화문 조직위 사무국에서 처음 만난 것은 10월 어느 날이었다.
『76년 몬트리올올림픽이나 현재 준비 중인 LA올림픽(84년)에 버금갈 88 올림픽전산시스템을 국내 기술로 개발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하지요. 현재 기술만으로도 올림픽 때까지 훌륭한 전산시스템을 개발할수 있습니다. 올림픽전산화는 우리나라 정보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날 것으로 자신합니다. 이 영향력 때문에라도 외국 기업들에 이 프로젝트를 맡기면 않됩니다.』
『그렇다면 성소장께서 올림픽 전산화에 대한 기초조사를 좀해주시오.』
이원경 총장과 만난 직후 성기수 소장은 즉시 선임연구원 이단형(현 시스템공학연구소 책임연구원)을 팀장으로 하는 올핌픽 전산시스템 개발 기초조사팀을 만들었고 82년부터 본격 활동에 나섰다.
이 조사팀에 대한 예산지원은 그러나 올림픽 조직위원회가 아닌, 과기처의 특정연구개발사업비를 부랴부랴 끌어온 것이었다. 올림픽전산시스템 개발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고도 조직위 측은 당장 필요한 비용을 82년도 예산에 포함시키지도 않았던 것이다. 전후 사정을 감안해 보면 두 사람의 만남에서 이원경 총장은 단지 88올림픽전산시스템의 윤곽 정도를 알아보고 싶어한 반면 성기수 소장은 엄청난 기대를 걸고 있었던 얘기가 된다.
막 출범한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로서는 다른 업무에 비교해서 전산시스템의 개발계획 수립이 그리 시급했던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조직위 측은 여차하면 84년에 치뤄질 LA올림픽 전산시스템을 그대로 들여올 심산이었다. 실제로 LA올픽에서는 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조직위원회가 미국회사를 동원해서 개발한 경기결과처리시스템( SIJO)를 들여와 약간 수정해서 사용할 판이었다.
그러나 국내최고 권위의 엘리트 기술집단을 자부하고 있는 KAIST 전산개발센터 측 입장은 달랐다. 88올림픽전산시스템을 자체 개발하는 일은 절대절명의 과업이었다. 무엇보다도 KAIST의 기술개발 능력을 대내외에 평가받을 수 있고 88년 이후 차기 올림픽전산시스템 수주 가능성 등 세계무대 진출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KASIT를 출연연구소로 거느리고 있는 과기처 입장 역시 성 소장 말대로 프로젝트 를 성공적으로 추진했을 경우 국내 정보산업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엄청나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KAAST와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간 시각 차가 결정적으로 깊어진 것은 83년에 들어서면서였다. 시기가 시기였던 만큼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는 88올림픽에 이용할 전산시스템의 중요성을 비로소 인식했고 자체적인 연구조사에도 나서기 시작했다. 이해 봄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는 막바지 준비작업에 도달한 LA올림픽조직위원회 측에 SIJO에 대한 정보제공을 요청했다. 일단 어떻게 돌아가는 시스템인가가 궁금했고 직접 개발한다면 자문도 필요한 시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LA올림픽조직위원회 측의 답변은 의외였다. SIJO에 대한 견학이나 정보 제공을 조건부로만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조건이란 LA올림픽조직위원회가 그랬던 것처럼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도 SIJO를 그대로 인수해 달라는 것이었다. LA올림픽조직위원회는 흑자 올림픽을 위해 갖가지 묘책을 마련 중이었고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SIJO를 차기 올림픽조직위원회에 판매한다는 계획이었다.
88올림픽에 대한 국내외의 반응이 『과연 치룰 수 있을까』라는 비관론이 지배적이었던데 바덴바덴의 결정이 있기까지 고비 때마다 미국의 도움을 받은 바 있어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로서도 LA 측의 이같은 조건은 그리 무모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서울올핌픽조직위원회에 기술 담당으로 특채됐던 H씨의 회고.
『조직위 관계자 다수가 SIJO의 도입을 찬성하는 쪽이었어요. 게다가 고위층 역시 전산시스템 때문에 대세를 그르칠 필요가 있느냐는 시각이었죠. 올림픽을 치룬 경험이 전무한 데다 치안문제 등으로 안팍의 시선이 비판적이던 상황이었습니다. 성공 여부도 불투명한 전산시스템을 자체 개발한다는 것은 그만큼 큰 모험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튼 당시로서는 몇 차례 올림픽을 치른 미국의 도움이 필요했었죠.』
이에 대해 KAIST측은 나름대로 반론을 폈다. 당시 기초조사팀으로 활동했던 C씨의 회고.
『KAIST측은 82년부터 착수한 기초 연구조사 분석을 통해 SIJO가 이미 70년대의 낡은 컴퓨터 사상에 의해 설계됐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기술 자체가 낙후된 것이었어요. 조직위 측에 구입 자체가 부당하고 에산낭비만 초래할 것이라는 분석 결과를 제출했습니다. 덧붙여서 KAIST가 확보하고 있던 기술이 오히려 앞서 있음을 부각시켰죠. 사실이 또한 그랬구요.』
그러나 상황은 갈수록 KAIST전산개발센터에 절대 불리하게 이끌어지고 있었다. 83년부터 본격화된 88올림픽 방송 중계권 협상만 해도 그랬다. LA올림픽조직위원회 측은 최고의 흥행권을 쥔 미국의 방송사들과 거래를 통해 SIJO구입 조건을 중계권 협상에 연계시키는 방법으로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에 압력을 가했곤 했던 것이다.
SIJO의 도입과 자체개발을 놓고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와 KAIST가 팽팽한 대립을 보이고 있을 때 서울의 한 신문은 역대 올림픽 전산시스템 개발과 운영 사례를 모아 분석한 기사를 통해 사실상 조직위 측 입장을 대변함으로써 세인의 눈총을 사기도 했다. 전산시스템의 잦은 고장으로 기록이 자주 번복되는 등 운영에 큰 문제점을 드러냈던 68년 멕시코시티, 76년 몬트리올, 80년 모스크바 대회의 실패 이유를 주최국의 과학기술적 역량 부족으로 돌렸던 것이다.
일이 이처럼 불리하게 돌아가자 KAIST 전산개발센터는 방법을 바꿔 올림픽 전산시스템을 자체개발할 수 있는 기술과 노하우를 실증해 보임으로써 조직위를 설득해나가기로 했다. 기초조사팀에 참여했던 A씨의 회고.
『누구나 쉽고 아주 가깝게 접할수 있는 사례에서 기술과 노하우를 실증해 보이기로 했습니다. 우리팀은 그해 10월 인천에서 64회 전국체전이 열린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고 종목수나 운영면에서 전국체전이 올림픽보다 더 큰 규모라는 점을 착안해내기에 이르렀죠. 우선 체전 전산시스템을 개발해서 운영해보는 과정을 통해올림픽전산시스템의 실체와 KAIST의 기술수준을 증명해보일 셈이습니다.』
이같은 아이디어는 과기처로부터 『매우 적절하다』라는 반응과 함께 특별 예산지원까지 약속을 받아냈다. KAIST전산개발센터는 이에 앞서 이미 다양한 루트를 통해 몬트리올 올림픽, LA 프레 올림픽, 뉴델리 아시안게임, 에드먼튼 유니버시아드 등 이미 치뤄진 세계적인 스포츠행사의 전산시스템 자료를 수집, 분석까지 마친 상황이었다.
이같은 지원과 기초조사를 토대로 전산개발센터는 인천 체전 개막을 불과 3개월 앞둔 83년 7월 전국체전 전산시스템개발에 착수하게 된다.
인천시청의 당초 계획은 각종 전자 운영시스템 총괄사업자인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를 통해 각종 하드웨어 기반의 전자시스템 정도를 도입하려던 수준이었다. 이를테면 광섬유 선로를 이용한 페쇄회로TV, 팩시밀리 네트워크, 사설교환기( PABX) 등을 설치 운영하는 것이었다.(KAIST 전산개발센터는 나중에 KIET의 위탁연구기관으로서 체전전산시스템의과 28개 종목의 경기결과처리 및 관련정보 제공용 소프트웨어 개발에 나선다.)
42개 경기장에 설치된 단말기를 통해 집계된 경기결과를 서울 KAIST전산개발센터의 대형컴퓨터 IBM 3032로 전송해서 처리하고 그 결과를 다시 각 경기장의 단말기, 전광판, 프린터 등에 내보내는 방식의 체전전산시스템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다. 일반인들로부터도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 TV 등 언론은 인천 전국체전 두고 88올릭픽을 앞두고 치뤄진 에행 올림픽 체전 또는 올림픽전산시스템 점검 체전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인천체전이 끝난 직후인 83년 10월 어느 날 성기수 소장은 광화문의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사무국에서 노태우 위원장과 자리를 마주했다. (인천체전 전산시스템의 성공적 운영을 확인한 조직위 측이 이 만남을 주선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날 만남은 그렇게 구체적인 대화가 필요하지 않았다.
『자신있습니까?』
『자신있습니다.』
『국내 개발로 결정했으니 책임지고 수행해 보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서현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