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스콧 감독의 「더 팬」은 야구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야구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에서 스포츠영화가 주는 맛을 느끼려는 관객은 이내 실망할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이 영화가 작가를 위협하는 독자의 이야기인 「미저리」 유형임을 어느 순간 알게 될 것이다.
「더 팬」은 스타가 무엇인지를, 팬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영화이다. 아울러 스타에게 종속되어 있는 팬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스타란 팬에게 종속된 자임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일반화시켜 말한다면 저자(스타)보다 독자(팬)가 더 의미있는 시대인 포스트모던한 세상에서 야구팬이 어떻게 야구라는 공연예술(?)의 저자가 되는가를 보여주는 흔치 않은 귀중한 영화이다.
길 레나드(로버트 데 니로 분)는 일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권위를 박탈당한 자이다. 그는 아내에게, 사랑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사업에 대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한다.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모든 소중한 것들(아들, 리틀야구단 시절의 화려함)에 대한 기억과 흔적뿐이다. 그 기억과 흔적이 위로를 주지만 그것을 되찾으려는 시도는 번번이 좌절당한다.
그는 인간과 세계에 의해 늘 눈총받는 자이다. 그에게 남은 유일한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야구팬으로서의 길 레나드이다. 생방송에 전화통화로 참가하여 겨우 야구해설가에게 야구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말할 수 있고, 자신의 이름을 직접 밝힐 수 있는 위치야말로 그에게 남은 마지막 가치이다. 야구 스타 바비 레이번(웨슬리 스타입스 분)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직장에서 해고당하는 일까지 초래하지만 그럴 수록 그는 거기에 더욱 집착한다.
자신의 상징인 기호 11번을 양보해주지 않는 후안 프리모 때문에 시합마다 저조한 타율을기록하는 이 야구스타를 위해 길 레나드는 11번의 행운때문에 연일 최고의 타율을 올리는 후안 프리모를 살해한다.하지만 정작 스타인 바비 레이번은 저조하던 자신의 타율이 어떻게 정상적이 되었는지를 알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야구스타란 야구팬을 위해 존재하며 팬이야말로 스타라는 인물을 만드는 저자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따라서 그는 감행한다. 스스로의 노력과 깨달음으로 저타율의 악몽을 극복했다는 바비 레이번의 미몽을 깨우쳐주기 위해, 그리하여 그는 영화의 끝에서 팬(관객)인자신이야말로 스타 바비 레이번의 타율을 생성시키는 진정한 저자임을 증명한다.
아울러 그 증명의 총격에 의해 살해당하는 길 레나드의 모습은 포스트 모던한 시대의 저자의 모습에 대한 상징이다. 저자는 자신이 산출한작품에 의해 자신이 창조한 인물에 의해 살해당함으로써 작품으로부터 사라진다는 것이다(이 영화가 길 레너드의 회고임을 기억하라). 포스트모던한 세계에서 진정한 주체는 독자이며 시청자이며 관객인 것이다. 서서히 광기를 드러내는 로버트 드 니로의 연기가 볼 만하다.
<채명식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