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컴퓨터 파노라마(38);정착기 (2)

80년대 PC산업과 MSX

83년께 세계 PC업계는 애플, 탠디, IBM, 오스본, 쿠퍼티노, 코모도어, 아타리, 타이멕스 등 10여개 미국 회사들이 군웅할거하던 시기다. 그러나 이들이 공급하는 PC는 모두 독자적으로 설계된 것들이어서 타 기종과의 소프트웨어 호환성이 결여돼 있다는 단점을 갖고 있었다.

10여개사 외에 또다른 세력으로는 이른바 호환기 생산업체들이 있었다. 수적으로 전체 컴퓨터업계의 99.9%에 해당됐던 이들은 그러나 독자개발 능력이 없어 애플이나 IBM 등을 복제생산하는 호환기사업에 주력하고 있었다.

83년께는 국내에서도 십수개의 기업이 국산 컴퓨터 제조라는 명목으로 PC사업에 뛰어들던 시기였다. 물론 국내기업의 목표는 대규모 개발비 투자와 기반기술이 요구되는 독자기종보다는 호환기 쪽이었다.

이들이 생산한 호환기를 놓고 장래성과 타산성 등을 저울질해 보던 대상은 크게 국산 교육용 컴퓨터계열, 애플컴퓨터의 「애플II」계열, IBM의 「IBM PC/XT」계열, 그리고 미국 마이크로소프트와 일본 아스키사가 규격을 공동 설계한 「MSX」계열 등 대략 4가지로 압축되고 있었다.

이 가운데 교육용 컴퓨터계열은 (본란에서 여러번 언급했듯) 삼성전자, 금성사, 동양나이론(효성컴퓨터), 한국상역(현 한국컴퓨터), 삼보컴퓨터 등 5사가 1천대씩 모두 5천대를 생산해 각급 학교에 납품키로 한 PC다. 그러나 회사마다 하드웨어 규격이 제각기 달랐고 설계 사상도 70년대의 마이크로컴퓨터 개념을 도입한 것이어서 굳이 호환PC라고 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계열이 업계의 저울질 대상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교육용 컴퓨터 계획 자체가 컴퓨터산업을 부양하기 위한 국책 프로젝트였다는 점때문이었다.

70년대 말부터 이른바 「애플신화」를 창조해낸 애플컴퓨터의 애플II계열은 초창기 국내에서 삼보컴퓨터 등 전문업체들이 가세하기는 했지만 청계천 세운상가 등 50여개 중소기업에 의해 생산, 보급돼 인기를 모았다.

애플II계열은 무엇보다도 패키지화된 DOS 운용체계와 6800과 같은 최신식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채택하는 등 세련된 규격감각이 돋보여 설계기술 면에서 국산 교육용 컴퓨터보다 2∼3년 정도 앞섰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부품의 조립만으로 복제가 가능했던 것도 바로 세련된 규격감각때문이었다.

IBM이 애플II의 성공에 자극받아 발표한 것이 81년의 「IBM PC 5150」이고 이를 16비트로 업그레이드해 82년에 발표한 기종이 「IBM PC/XT」이다. 이 기종에서 유래된 PC라는 말은 이 때부터 일반인 사이에서도 폭넓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PC/XT는 8비트 애플II를 한차원 상위기종으로서 마이크로소프트의 「PC-DOS(MS-DOS)」 운용체계와 인텔의 8086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채용하고 있었으며 설계가 정교하고 호환성과 확장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얻고 있었다. PC/XT의 성공으로 컴팩, 델, 제니스 등 미국 내에서만 수백여개의 호환기 제조업체들이 등장하게 됐다.

83년 말을 전후해 PC/XT 호환기사업에 관심을 보인 곳은 현대전자를 필두로 금성사, 삼보컴퓨터, 삼성전자, 대우전자, 스포트라이트컴퓨터(한국상역의 자회사) 등 10여개사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 83년 창업한 신생 현대전자는 첫해부터 호환PC사업에 적극 뛰어들었고 미국의 자동차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키던 「현대 포니」의 명성을 PC분야에 이용하겠다는 야심찬 계획도 세워 놓고 있던 터였다.

PC/XT 호환기업계의 사업참여는 대부분 미국의 IBM 호환기업체들과 기술제휴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말이 기술제휴였지 사실은 미국기업들이 설계한 제품을 국내에서 조립생산하는 수준이었다.

주요 제휴관계로는 현대전자-미시우스, 금성사-OSM, 삼보컴퓨터-PCPI, 스포트라이트-MDS, 대우전자-코로나, 삼성전자-컴팩 등이었다. 이 가운데 컴팩을 제외하면 모두 직원 10여명 내외의 이름없는 벤처기업이었지만 국내에서는 대단한 업체로 알려지기도 했다.

국내기업이 생산한 PC는 기술제휴 회사의 상표를 부착, 대부분 미국으로 수출됐다. 실제 IBM 호환 PC사업은 처음부터 내수보다는 수출을 겨냥하고 시작된 것이었다. 컴퓨터 국산화와 함께 수출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은 시절이었다. 이즈음 한국계 미국기업 텔레비디오가 구로공단에 세계적인 규모의 컴퓨터 CRT 터미널 공장시설을 갖추고 1억달러 이상의 제품을 수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83년 한해동안 텔레비디오를 비롯, 동양나이론, 동양정밀, 한국상역 등 국내기업들이 CRT 터미널분야에서 기록한 수출액이 2억달러나 됐다. IBM 호환 PC사업은 과정이야 어쨌든 CRT 터미널의 대를 잇는 황금 수출분야로 부상한 것이다.

애플과 IBM의 경쟁 틈바구니에서 중소기업들은 애플II를, 전문업체와 대기업들은 IBM 호환기를 각각 선택함으로써 국내 PC산업이 두 갈래로 가닥이 잡혀질 즈음 혜성처럼 등장한 것이 MSX이다.

MSX는 83년 6월 마이크로소프트와 아스키(ASCII)가 공동 주창해 제정한 표준규격에 따라 만들어진 일종의 주인없는 공개된 PC였다. 본체, 키보드, 화면, 주변장치 인터페이스 등 주요 4부분으로 이뤄지는 것은 다른 PC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표준규격은 이 4개 부분의 구성을 정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MSX는 다른 PC들과는 다른 두가지의 특징을 갖고 있었다. 우선 기존 PC들과 달리 소프트웨어 호환성을 염두에 두고 설계됐다는 점이었는데 이는 생산회사는 달라도 하드웨어 규격만 준수해주면 얼마든지 소프트웨어 호환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예를 들어 플로피 디스크의 경우 디스크 형식만 표준에 부합된다면 어느 회사의 것을 사용해도 무방했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IBM이나 애플과 달리 마이크로소프트와 아스키가 MSX규격에 대한 권리를 고집하거나 직접 생산하지 않고 이를 업계에 공개해 버렸다는 점이 꼽혔다. 원한다면 누구든지 제품을 생산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아스키가 MSX규격을 공개한 것은 애당초부터 하드웨어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MSX기종에서도 실행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개발, 공급하겠다는 것이 두 회사의 기본전략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경우는 이미 IBM PC용으로 개발했던 베이직, C, 코볼, 멀티플랜, PC-DOS 등 걸출한 패키지들을 MSX버전으로 수정해 놓고 있던 터였다.

면도날을 팔기 위해 면도기를 무상 제공하는 것과 같은 이 전략은 그대로 맞아 떨어져 표준규격 발표 3개월 만에 미국과 일본에서 50여개의 하드웨어업체가 제품을 생산, 시판에 돌입했을 만큼 MSX는 빠른 속도로 돌풍을 일으켰다.

미국과 일본에서 MSX열풍이 일자 국내에서는 83년 11월 금성사, 삼성전자, 대우전자 등 가전3사가 여기에 뛰어들었다. 일본의 MSX 생산업체들이 산요, 마쓰시타(내셔널), 미쓰비시, 소니, 야마하 등 가전업체 일색이었던 것처럼 국내 가전3사의 참여결정 역시 별다른 의미가 있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아스키는 애플II와 PC/XT가 양분해버린 PC시장에 후발인 MSX를 조기 진입시키기 위한 마케팅전략으로 이른바 가정용 컴퓨터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있었다. MSX를 사무실의 생산성 향상도구로서가 아니라 가정에서의 취미오락용이나 가사보조용으로 부각시킨다는 것이다. 제품에 대한 명칭도 애플과 IBM이 개인용 컴퓨터라며 두루뭉수리하게 불렸던 것과 달리 가정용이라는 뜻의 홈(home)이라는 단어를 앞에 붙여 「홈 퍼스널 컴퓨터」라는 별칭을 사용했다.

국내 가전3사가 경쟁적으로 MSX 생산에 적극성을 보인 것은 이때문이었다. MSX를 가전과 컴퓨터의 중간쯤으로 보았던 데다 치열한 기업경쟁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3사 가운데 MSX사업 참여를 계기로 컴퓨터분야에 진출키로 한 대우전자의 경우 스탠퍼드대학 박사 출신 안경수씨(전 삼호물산 대표, 현 한국후지쓰 대표)를 본부장으로 영입하면서 전격적으로 컴퓨터사업부를 신설하는 등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가전3사에 MSX사업에 대한 연결고리를 만들어 준 곳은 큐닉스 사장이던 이범천씨(전 한국마이크로소프트 대표, 현 큐닉스컴퓨터 회장)였다.

이에 앞서 큐닉스는 83년 초 국내기업 사이에서는 누구도 눈여겨 보지 않았던 매출액 5천만달러의 마이크로소프트와 기술제휴 겸 에이전트 계약을 맺어 놓고 있었다.

그러나 83년 말 마이크로소프트 등과의 라이센스 계약에 앞서 3사는 MSX의 국내생산에 대한 내부시각이 저마다 달라 쉽게 사업참여 결정을 내릴 입장이 못됐다. 3사마다 「해볼 만하다」라는 긍정론과 「자체기술 개발경험이 없어 결국 실패할 것」이라는 비관론이 팽팽하게 맞선 와중에서 이범천씨의 논리는 사뭇 신선한 것이었다.

『국내 PC시장이 그동안 복제 위주로 형성돼 제자리 걸음마를 해왔다면 MSX사업은 컴퓨터 대량생산체제와 소프트웨어분야의 고도화 등 산업 전반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다. 또 사용자에게는 저렴하고 편리한 컴퓨터 환경이 마련되는 것이다. 일본에서 20여개 기업이 뛰어들고 있는 것은 유럽과 미국시장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소프트웨어가 충분하고 대량생산체제가 갖춰진다면 수출을 통해 산업규모를 얼마든지 키울 수 있게 된다.』

이범천씨과 큐닉스의 노력은 결국 그해 11월 3사의 최종결정을 이끌어 냈고 4개월 후인 84년 3월부터 완제품이 출하되기 시작했다.

MSX는 국내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활화산처럼 타오를 것 같던 IBM 호환 PC시장을 주춤거리게 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MSX의 열기는 88년 체신부의 제2차 교육용 PC기종 선정때까지 4년여 동안 국내 PC시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높은 인기를 누렸다. 결국 치열한 경합 끝에 IBM 호환PC가 교육용 PC기종에 최종 낙점되면서 MSX는 방향을 잃고 시장에서 점점 차취를 감추기 시작했던 것이다.

〈서현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