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컴퓨터 파노라마 (39);정착기 (3)

출연연구소 통폐합과 ETRI의 탄생

1960년대 이후 컴퓨터, 반도체, 통신 등 전자분야 신기술 개발은 대부분 정부 출연연구소가 도맡아 해왔다. 민간 업계의 신기술 개발이 요원하던 70∼80년대 출연연구소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정부는 수출대체 또는 수출전략 품목 관련 신기술 개발을 특정연구과제로 지정해서 출연연구소에 맡겼다. 이렇게 개발된 신기술은 곧바로 민간업계에 넘겨져 상품화했다. 80년대 초반 국내를 떠들썩하게 했던 64K D램이나 시분할전전자교환기(TDX-1)의 개발, 교육용컴퓨터 국산화 등의 프로젝트가 대부분 이런식으로 빛을 본 것들이다.

출연연구소들은 특히 전자산업 대국을 꿈꾸어 온 역대 정부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보배로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바로 이같은 역할의 중요성 때문에 정치적 격동기나 정부조직의 이해관계에 따라 출연연구소들의 운명은 수시로 달라졌다. 어떤 때는 출연연구소를 전문 분야별로 대거 출범시켰다가도 어떤 때는 비숫한 연구소끼리 통폐합을 단행하곤 것이다.

66년 2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필두로 하나둘씩 출범하기 시작한 출연연구소는 정부의 기초과학 또는 기반기술 확보라는 정책적 배려에 힘입어 79년경에는 16개가 활동중이었다. 그러나 80년 말 신군부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는 사회전반의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16개의 연구소를 9개로 통폐합 해버렸다.

통폐합된 후 살아남은 9개 연구소는 KIST, 한국에너지연구소, 한국동력자원연구소, 한국표준연구소, 한국기계연구소, 한국화학연구소, 한국인삼연초연구소, 한국전기통신연구소(KETRI), 한국전기기술연구소( KIET) 등이었다. 이 가운데 통폐합 규모가 가장 컸던 곳은 한국전기통신연구소(KETRI)였고 통페합의 칼날이 가해지지 않은 유일한 곳은 KIET였다.

이 가운데 KETRI는 한국통신기술연구소(KTRI)가 한국전기기시험연구소와 통합한 것이었다. KTRI와 한국전기기기시험연구소는 KIET와 함께 76년 말 출범한 전자산업 분야 전문 3대 출연연구소로서 한때 트로이카 연구소로 불리웠을 만큼 명성이 높았다. 3공화국이 컴퓨터, 전자통신, 반도체 등 3분야를 전자산업의 간성으로 육성하겠다는 방침 아래 출범시킨 의욕적인 연구소였다.(3개 연구소의 출범과정에 대해서는 본란 제24회에서 살펴본 바 있다)

85년 KETRI가 남아 있던 KIET를 흡수 통합한 다음 한국전기기시험연구소 부문을 분리해낸 것이 오늘날의 한국전자통신연구소(ETRI)이다. 이 과정을 알기 쉽게 설명하면 왼쪽의 <그림>과 같다.

복잡다기한 조직들이 얽히고 혀 출범했던 ETRI는 이후 단 한번도 통폐합 과정을 되풀이하지 않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만 그 소속이 92년 과기처에서 체신부로, 95년 다시 정보통신부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에 반해 국보위나 5공화국때 통폐합됐던 다른 연구소들은 6공화국 이후 부활을 외치기 시작하면서 90년대 들어 거의 원상복구됐음은 물론이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훗날 정부쪽이나 출연연구소 관계자들은 85년 ETRI의 출범을 대해 『76년 이후 거듭돼온 출연연구소 개편바람이 마무리 되고 비로소 첨단 전자통신기술 연구체제가 정착됐다』고 평가하고 있을 정도다. 다른 연구소들이 특성과 자율적 역량이 무시된 채 통폐합돼 방황하고 있을 즈음 ETRI의 탄생은 오히려 갈라진 땅을 굳게하는 결과를 가져와 우리나라 전자통신 부문 발전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ETRI의 출범은 당시까지 제각각의 길을 가던 전자(컴퓨터와 반도체) 부문과 통신 부문이 상호 연계 필요성을 느낀 나머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결과라고도 할 수 있었다. ETRI의 출범은 그래서 전자와 통신이 결합한 제3의 기술 즉, 정보통신 기술의 탄생 가능성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ETRI의 출범에 앞서 당시 국내외의 컴퓨터, 통신, 반도체 연구 분야는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었다. 우선 미국, 일본, 영국 등 선진국은 이미 80년 초부터 5세대 컴퓨터 개발연구에 나서고 있었다. 이런 노력들은 80년대 중반부터 결실을 맺어 일부 선진국들 사이에서는 이른바 「하이테크 혁명」의 물결이 체감되던 상황이었다.

국내 언론과 지식층에서도 크게 유행했던 「하이테크 혁명」은 이제까지 하드웨어 위주로 발전해온 산업 구조가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급격하게 변화된다는 뜻을 담고 있었고 이 혁명을 이끌어 내는 것이 바로 최첨단 반도체와 통신 기술 이라는 것이었다. 앨빈 토플러와 같은 미래학자들은 『컴퓨터, 반도체, 통신 기술의 결합은 음성, 데이터, 화상 등의 정보를 동시에 송수신하는 종합 정보통신사회를 가능케 하며 소비 패턴도 「정보의 소비」형태가 될 것』이라고 주장, 큰 반향을 일으켰다.

국내에서는 이즈음 KETRI가 82년 세계에서 9번째로 TDX-1 개발에 성공한 것을 비롯 83년 삼성반도체통신이 KIET의 특정연구과제 개발결과를 기반으로 세계에서 3번째로 64K D램 개발에 성공했다는 발표 등이 잇따라 터져 나왔다. 또 한국전기통신공사와 한국데이타통신주식회사(현 데이콤)가 출범하면서 통신서비스가 시작됐고 이어 청와대 과학기술진흥확대회의가 83년을 「정보산업의 해」로 지정하자,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순식간에 하이테크 혁명기에 들어선 것처럼 들뜨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컴퓨터, 반도체, 통신 분야에 대한 투자규모나 기술 수준으로 볼 때 미국, 일본, 유럽 등 선진국과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었다.

바로 이런 점을 간파한 정부는 81년에 작성된 제5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 통신기기의 성능과 품질향상을 위해서는 반도체와 컴퓨터의 사용이 필수적임을 직시했고 관련 산업의 지원을 주요 정책목표로 설정해 놓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실제로 지원 수준은 매우 미미한 것이었다. 더욱이 통신부문과 전자부문의 기술 개발이 각각 서로 다른 연구소에 의해 진행되는 상황에서는 상호 기술통합이나 지원체계는 요원할 수밖에 없었다.

KETRI(통신부문)와 KIET(컴퓨터「반도체)의 통합은 사실 이들이 출범한 직후인 77년 말부터 상공부에 의해 논의돼온 것이었다. 당시 3대 연구소 가운데 KIET는 상공부, KTRI는 체신부, 한국전기기기시험연구소는 동자부 소속이었는데 상공부가 이를 KIET 중심으로 통합하자는 안을 냈던 것이다. 물론 이 안은 정보산업 주도권을 놓고 대립하던 과기처와 체신부의 반대에 부닥쳐 빛을 보지 못했다.

상공부 안은 그러나 80년 11월 국보위에 의해 그대로 받아들여져 KETRI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이때 통합된 곳은 KTRI와 한국전기기기시험연구소 뿐이었다. KIET가 제외된 것은 국보위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KIET는 정부 예산이 빈약해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의 차관을 들여와 구미공단내에 설립한 것이었는데 IBRD측이 연구소 통폐합을 반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 굴복할 국보위가 아니었다. 국보위는 KETRI와 KIET의 소장 및 감사를 겸임시킴으로써 행정적 차원의 통합을 시도했다. 그뿐만 아니라 「출연연구소 운영개선 방안」이라는 것을 만들어 컴퓨터, 반도체, 통신, 전기부문 출연연구소의 소속을 모두 과기처로 단일화 해버렸던 것이다.

두 연구소의 행정 통합체제는 겸임소장이던 최순달(전 과기처장관)이 82년 사임하면서 쉽게 끝이 나는 듯했다. KETRI와 KIET가 각각 백영학(현 ETRI초빙연구원)과 김정덕(현 과기처 연구개발조정실장) 등 두 공학박사를 각각 소장으로 영입하면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두 연구소가 다시 통합 절차를 밟게된 것은 KIET가 84년초 정기이사회에서 구미공단내 6만평의 연구시설과 부지를 매각하고 다른 지역에 안정된 연구시설을 확보할 것을 결의하면서 부터였다. 당초 KIET가 구미공업단지에 들어서게 된 것은 고향인 구미에 대규모 전자공업단지를 조성하겠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구미는 고급 연구원들과 그의 가족을 유치하기에 문화적 교육적 환경이 너무 미약했던 도시였다. KIET 내부 사정 역시 신기술개발 연구에 대한 재원 확보가 어려워지면서 연구소 운영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던 터였다.

이와중에서 KIET는 84년 4월 구미단지 시설과 부지를 금성반도체에 매각하고 KETRI 옆의 5만여평을 사들여 대덕단지로 이전했다. 굳이 KETRI 인근 부지를 사들인 것은 두 연구소의 통합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움직들이 결실을 맺어 두 연구소의 통합은 84년 8월부터 과기처에 의해 본격 검토됐고 마침내 그해 12월29일에 열렸던 제48차 경제장관회의에서 의결됐다.

ETRI는 85년 3월26일 대전지방법원에 전두환 대통령을 설립자로 한 설립등기를 마침으로써 그해 5월 정식 출범할 수 있게 됐다. 초대 소장에는 한국전기통신공사 제2부사장에 이어 말년의 KETRI소장을 하던 경상현(전 정통부 장관)이, 이사에는 한국전기통신공사 사장 이우재(전 체신부장관), 한국데이타통신 사장 이용태(현 삼보컴퓨터 회장)이 각각 임명됐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컴퓨터, 통신, 반도체 분야 연구 활동의 맥은 76년부터 80년까지 KIET, KTRI, 한국전기시험연구소 등 트로이카가 활동하던 제1세대, 81년부터 85년 초까지 KETRI와 KIET가 활동하던 제2세대, 그리고 ETRI가 활동해온 제3세대 이후로 구분해 볼 수 있겠다.

<서현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