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 시대는 막을 내리고, 미국 직배사와 대기업이 영화계 구도를 재편할 것인가.
최근 곽정환씨(66, 합동영화사 대표)와 이태원씨(58, 태흥영화사 대표)의 잇달은 구속 이후 영화계 일각에서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충무로 자본이 실종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증폭되고 있다.
지방 배급업자들이 회계장부와 함께 몸을 숨기면서 당장 극장에 걸려야 할 영화의 개봉이 일시적으로 차질을 빚는 것은 오히려 별 문제가 아니라는 지적이다.미국 직배사-대기업-충무로의 불안정한 삼각구도로 간신히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는 국내 영화시장이 미국 직배사와 대기업의 이원체제로 재편될지 모른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불안감이 더욱 충무로를 얼어붙게 하고 있는 것이다.
한때 영화계 전체를 대표했던 충무로는 지난 88년 이후 밀어닥친 미 직배사와 21세기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리는 영상산업에 앞다투어 뛰어든 대기업에 밀려 이미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게 사실.
그나마 곽씨와 이씨가 영화제작부터 배급을 거쳐 극장상영에 이르는 전시스템을 갖추고 할리우드산 블록버스터(흥행작)로 무장한 미국 직배사와 거대 자본을 내세운 대기업을 견제함으로써 불안정한 삼각구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충무로를 대표해 온 양대 거두가 이번에 「영화계 비리 척결」이라는 이름으로 경찰의 철퇴를 맞으면서 우리 영화시장은 자칫 잘못하면 어렵게 버텨온 힘의 균형을 잃게 될 위기에 처했다고 영화인들은 진단하고 있다.
현재 국내 영화시장 규모는 약 3천억원 정도. 이같은 수치는 검찰 수사에서 드러나고 있는 이른바 물밑시장까지 합친 액수라는 게 영화인들의 주장이다. 따라서 영상산업의 꽃이라는 화려한 외피로 포장된 영화시장이 알고 보면 지방극장에서 입장권을 찢지 않고 되파는 「표돌리기」 등 온갖 불법적 수단을 동원해도 약국에서 파는 드링크제 중 하나인 박카스의 매출규모밖에 안된다는 것. 극장에 영화를 걸기 위해 속칭 「오치」로 불리는 뒷돈이 거래돼 온 것 역시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구조적 비리라는 지적이다.
이번 곽씨와 이씨의 구속은 이러한 구조적 비리를 근절할 수 있는 제도적인 보완책을 끌어낼 수만 있다면 오히려 영화계 육성을 위한 호재라는 시각도 있다. 즉 영화계의 탈세와 비리수사를 계기로 이러한 부조리가 생겨나는 근본적인 원인을 뿌리 뽑고 건전하게 영화계를 육성할 수 있도록 정부당국과 국회가 법적 제도적인 보완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는 것.
최근 정부와 신한국당이 민간으로 구성된 한국공연예술위원회(가칭)에 기존 공연윤리위원회의 영화심의 기능을 이양하는 것을 골자로 한 영화진흥법개정안 정기국회 상정 계획을 발표한 것과 관련, 영화인들은 단순히 헌재의 위헌판결에 따른 법적 뒷수습 차원이 아니라 영화계를 근본적으로 육성시킬 수 있는 방안이 적극적으로 검토돼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정부당국과 국회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유통배급업 개념 도입을 통한 영화 배급구조 개혁, 흥행수입 유출 방지를 위한 통합 전산망 구축, 영화진흥기금의 확충, 민간자율기구에 의한 완전등급심의 등 영화인들의 의견을 수렴, 영화진흥법 개정작업에 임해 달라는 것이다.
법적 제도적 장치의 보완이 없는 사정한파는 영세자본으로 움직이는 충무로를 급격하게 무너뜨리고 매출액의 50% 이상을 영업 이익금으로 송금해온 미국 직배사와 아직 영화산업의 노하우가 부족한 대기업이 영화시장의 흐름을 주도하는 파행적인 이원체제를 가져올 우려가 있다는 게 영화인들의 한결 같은 주장이다.
<이선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