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자통신연구소(ETRI)와 주전산기 4사가 세계 최고 수준의 고속 병렬컴퓨터(주전산기) 연구시제품을 공동 개발, 우리나라가 중대형 컴퓨터국가로 받돋음할 수 있는 도약대를 만들었다. 비록 연구시제품 수준이지만 기존 주전산기 개발과는 달리 설계에서부터 제작에 이르기까지 모두 순수 우리 기술로 개발한 첫 고유모델이라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
이번에 발표된 주전산기는 현재 전세계 중대형 컴퓨터업체들이 경쟁적으로 채용하고 있는 대칭형 멀티프로세서(SMP)와 초병렬처리(MPP) 기술 등 신기술을 거의 모두 수용, 인텔 펜티엄프로(P6) 칩을 4개에서 2백56개까지 장착할 수 있을 정도로 시스템 확장성이 뛰어나고 최고 20GIPS(초당 2백억 명령어 처리) 처리속도에다 온라인 트랜젝션기능도 우수해 업무용 고속 병렬컴퓨터로 손색이 없는 제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게다가 ETRI가 독자적으로 고안한 「엑센트 네트」라는 스위칭 기술을 채택, 현재 외국업체가 선보고 있는 다중버스 구조의 고속 병렬컴퓨터의 단점인 시스템 불안요소를 제거하고 가용성을 최대로 높였다는 것은 적어도 스위칭기술에서만큼은 외국 컴퓨터업체보다 한수 위 수준으로 올라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동안 미국, 일본 업체가 과학계산용 고속 병렬컴퓨터는 많이 개발했으나 업무용은 아직 연구용 시제품 제작단계에도 이르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처럼 컴퓨터 선진국에 앞서 업무용 고속 병렬컴퓨터 연구시제품을 개발한 것은 이제 국내 컴퓨터산업이 중대형 컴퓨터부문에서도 선진국과 견줄 수 있는 위치로 올라서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우리나라는 이번 연구시제품 개발과정에서 새로운 스위칭기술인 「엑센트 네트」기술을 포함해 모두 11가지의 핵심기술에 대한 국내외 특허권을 확보함으로써 갈수록 고조되고 있는 기술보호주의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 고속 병렬컴퓨터는 오는 98년까지 성능보완을 거쳐 연구참여 기업체에서 생산될 예정이지만 성능이 우수하다고 해서 판로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중대형 컴퓨터는 PC와 달리 운용체계, 관계형 데이터베이스관리시스템(RDBMS), 응용 소프트웨어 등 수많은 지원군이 있어야 하고 지원군 또한 여타 경쟁자보다 우수해야만 소비자가 관심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제품이 상용화될 때까지 다양한 응용 프로그램 등 우수한 소프트웨어도 우리 기술로 확보할 수 있도록 지금부터 서둘러야 한다. 이는 우리의 기술로 만든 중형 컴퓨터를 국가기간 전산망에 이용함으로써 외국 시스템의 도입으로 파생될 수 있는 국가기밀의 해외유출 등 여러가지 부작용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 있게 하자는 주전산기개발사업 취지와도 일맥상통한 것이다.
아무리 많은 개발비를 들여 신제품 개발에 성공했다 해도 지원제품이 개발 안돼 시장선점에 실패하면 경제적인 기대효과는 그만큼 적어질 수밖에 없다. 이번 고속 병렬컴퓨터 시제품개발 성공은 2년 10개월에 걸쳐 5백70억원의 연구개발비와 5백70명의 연구인력이 투입된 피나는 기술개발 활동의 결과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주전산기업계는 또 내년 조달시장 개방으로 보호막이 없어지는만큼 지금까지처럼 관수시장 중심의 안이한 영업에서 탈피해 민수시장 개척에 본격 나서야 한다. 특히 해외시장을 겨냥한 적극적인 마케팅으로 우리 손으로 만든 중형 컴퓨터를 수출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애플리케이션 개발 및 확보가 선결과제임은 물론이다.
고속 병렬컴퓨터 개발사업과 함께 서울대 신기술연구소와 삼성전자, 현대전자가 공동으로 98년 완성을 목표로 대형 컴퓨터 개발에 나서는 등 우리 업계의 중대형 컴퓨터 개발의욕은 대단하다. 그동안 우리의 컴퓨터 투자가 PC일변도임에 비추어 바람직한 현상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가 개발한 중형 컴퓨터를 세계시장에서 알아주는 제품으로 영업하는 일도 신형 컴퓨터 개발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번 고속 병렬컴퓨터의 기술적 개가가 한국 중대형 컴퓨터산업의 「제2 도약」의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