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맨홀 (65)

16:45.

김지호 실장은 시계를 보면서 다시 한 번 길게 담배연기를 뿜어냈다.

망원정 앞 버드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며 우수수 낙엽을 떨구고 있었다.

망원정.

강변도로를 따라 수없이 지나치는 차량에도 아랑곳 않고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었다.

망원정은 세종6년에 세종대왕이 형 효령대군을 위해 지은 별장이다. 정자를 지은 이듬해 혹심한 가뭄이 들어 농민의 삶을 걱정하던 세종대왕이 들판을 살피고자 이곳에 들렀을 때 마침 단비가 내려 喜雨亭이라 하고 손수 글을 써 하사하였는데, 성종15년에 성종의 형 월산대군이 정자를 크게 고치고 산과 강이 한데 어울려 더없이 수려한 주변경치를 멀리서 바라본다는 뜻에서 망원정이라 고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세종이후 역대 왕들도 서교(西郊:한양의 서쪽 지역)에 나와 백성을 격려한 후 빼어난 부근의 경치를 즐기며 한강에서 펼치는 수군들의 훈련광경을 살폈다고 전해지는 망원정 부근은 1885년 9월 이 땅에 처음으로 가설된 서로전선이 인천에서 한양으로 연결되기 위하여 한강을 건너지른 장소이기도 했다.

김지호 실장은 강 건너 선유봉에서 망원정 사이의 공중으로 가설되었던 전선을 생각할 때마다 지형을 적절하게 이용한 당시 통신 운용자들의 식견에 놀라곤 했었다.

인천에서 서울을 거쳐 평양에 이르고, 평양에서 의주를 거쳐 중국으로 연접된 우리나라 최초의 통신선이었던 서로전선은 당시 강폭과 지형을 보아 가장 적합한 장소인 망원정 부근에서 한강을 건너질러 가설되었다.

통제실 위치가 바로 그 지점.

1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나라의 통신망을 총괄하는 통제실이 설치될 만큼 좋은 지형을 갖추고 있는 것이었다.

김지호 실장은 강 건너 선유봉을 바라보며 1885년 설치된 우리나라 최초의 통신선이었던 서로전선을 생각했다.

중국이 우리나라를 종속시키기 위한 도구로 설치한 서로전선은 우리의 글은 보내고 받을 수도 없었다. 우리나라 돈과 우리나라 사람들의 부역으로 가설되었다. 함부로 만지지도 못했던 선산 나무들을 베어 전주로 세우고 그 위로 전선을 가설했다.

김지호 실장은 우리나라에 전기통신이 처음 도입될 당시의 상황을 떠올릴 때면 안타까운 마음을 억누를 수 없어 몸서리를 치곤 했다.

하지만 1백여 년이 지난 지금 그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어 이제 중국의 통신사업에 우리나라가 깊숙히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