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새해 볼만한 비디오

설연휴에 가족끼리 오붓하게 둘러앉아 볼 만한 비디오 몇 편을 소개한다. 매달 백여편씩 신작 비디오가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잘만 고르면 구작 타이틀 중에 오히려 주옥 같은 작품이 많다.

뭐든지 제멋대로인 신세대 딸과 잔소리가 지나친 구세대 어머니가 알게 모르게 갈등을 빚고 있는 가정이라면 모녀가 나란히 앉아 볼 만한 드라마로 「조이럭 클럽」이 있다. 이 영화에서 조이럭 클럽이란 낯선 미국 땅에서 살아가는 중국계 여인들이 가끔씩 모여 향수를 달래는 모임을 가리키는 말. 그들의 딸들은 귀한 자식에게 칭찬을 아끼는 동양적 교육관을 무관심으로 오해하기도 하고, 돈 많고 매력적인 백인청년과 결혼하기 위해 고향사람을 무시하는 등 때때로 부모세대들에게 배신감과 당혹스러움을 안겨준다. 그래도 여전히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는 딸들에게 그 어머니들이 들려주는 열 여섯 토막의 이야기가 조이럭 클럽의 테이블 위에 동화처럼 펼쳐진다.

자식사랑을 감추는 무뚝뚝한 아버지와 걸핏하면 말썽을 부리는 사춘기 아들 때문에 가족간에 서먹한 집안이라면 「나이트 오브 트위스터」를 권한다. 고집 센 부자가 사사건건 대립해 불화를 겪는 어느 시골마을 가정에 세찬 회오리바람이 불어닥치면서 가족 모두가 끈끈한 정을 확인하게 된다는 내용. 초속 2백의 강풍 속으로 돌진해 들어가는 장면 등 극한 상황에서 살아나는 가족애가 가슴뭉클하다.

「길버트 그레이프」는 집과 직장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하는 일상생활에 지치기 쉬운 우리시대의 가장들에게 가족의 의미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줄 만한 영화다. 몸이 너무 뚱뚱해 집 밖을 벗어날 수 없는 어머니와 살림살이에 찌든 누나, 더 이상 말을 듣지 않게 된 여동생과 정박아 남동생을 둔 주인공 청년이 지친 삶 속에서도 가족들을 보듬어 안고 살아가는 모습이 정겹다.

구작 비디오지만 출연진들은 아직도 할리우드의 신세대 스타들이다. 신정 극장가에 걸려 있는 97년판 「로미오와 줄리엣」의 히어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얼마전 출시된 「투영 투 다이」에서 브래드 피트와 함께 신들린 연기를 보여준 줄리엣 루이스, 그리고 「가위손」에서 기이한 머리스타일에 날카로운 가위를 들고 나와 위노나 라이더와 호흡을 맞췄던 조니 뎁을 이 영화에서 한꺼번에 만날 수 있다.

조니 뎁이 주연한 또 한편의 따뜻한 영화 「베니와 준」은 정신적인 결함이 있는 사람들끼리 정상인보다 더 창의적이고 정직하게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정신병을 앓고 있는 소녀 준과 그의 오빠 베니, 다정하고 맑은 영혼을 가진 샘 등 이 세 사람의 살아가는 모습이 잔잔한 감동을 준다.

미개봉작이라 아트필름 마니아가 아니면 비디오숍에서도 눈여겨 보지 않았을 「연어알」 역시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 줄 만한 작품. 에스키모의 관습에 따라 서구인과 동침해 자신을 낳았던 생모의 기억을 따라 알래스카의 작은 마을로 찾아온 여인이 역시 과거의 상처로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아가던 또 다른 여인을 만나 진실한 우정을 쌓아가는 과정이 아름다운 설원을 배경으로 한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게 펼쳐진다. 「바그다드 카페」를 기억하는 영화팬이라면 놓치기 아까운 수작이다.

틈만 나면 다투는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함께 보면서 우애를 돈독하게 다질 수 있는 작품으로 두마리 개와 한마리 고양이의 모험담 「머나먼 여정」을 권한다. 혈기 왕성하고 호기심 강한 개 챈스, 나이 지긋하고 현명한 개 섀도, 콧대 높고 까탈스러운 암코양이 새시는 한 집에 살면서도 걸핏하면 으르렁거리는 애완동물들. 주인가족이 집에서 멀리 떨어진 낯선 농장에 이들을 맡긴 채 휴가를 떠나자 세마리 동물들은 초조해진다. 결국 농장관리인 몰래 집을 찾아 나선 이들은 가파른 언덕을 넘고 위험한 숲을 지나는 동안 절친한 친구사이가 된다.

「그럼피어 올드맨」은 노부모가 계신 집에서 3대가 함께 볼 수 있는 유쾌한 가족영화다. 제목처럼 「심술맞고 까다로운(grumpier)」 할아버지들이 걸죽한 입담과 기상천외한 행동으로 안방을 웃음바다로 만들어줄 초특급 코미디다. 겉으로는 앙숙처럼 지내지만 사실은 이웃사촌인 두 노인이 사는 강가에 레스토랑이 들어선다는 소식을 듣자 노인들은 낚시터를 잃지 않기 위해 온갖 방해공작을 편다. 소피아 로렌, 잭 레먼 등 실제로도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는 원로배우들의 코믹하면서도 과장되지 않은 연기가 돋보인다.

신혼부부들에게 결혼식의 맹세는 남편과 아내의 평등한 관계 속에서 지켜진다는 평범한 지혜를 알려주는 영화로 「화이트」를 꼽을 수 있다. 성적 욕구불만을 이유로 프랑스 아내에게 이혼당한 폴란드 남편이 고향으로 돌아가 엄청난 부를 축적한 다음 전처에게 모든 재산을 남긴다는 유언장을 쓰고 죽음을 위장해 결국 진정한 사랑을 되살린다는 내용. 갈등과 불협화음을 극복하고 평등한 부부관계를 만들어가는 두 남녀의 이야기가 가슴에 와닿는 영화다.

「미세스 다웃파이어」의 크리스 콜럼버스가 만든 또 한편의 코미디 「나인 먼쓰」는 아이를 낳아 기르는 기쁨을 섬세하게 표현한 작품. 아내의 임신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아버지가 되는 것이 두려워 피하고 싶기만 했던 남편이 아홉달이 지나는 동안 가슴뭉클한 부정을 깨닫게 된다는 내용의 영화.

그밖에 가슴이 저리도록 아름다운 안개 속에 멀어지는 두 남매의 뒷모습이 오래도록 남는 영화 「안개 속의 풍경」, 고아가 된 물개를 돌보는 소녀의 이야기 「앙드레」,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야만 과학에 대한 맹신으로 황폐해진 우리의 삶을 치유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담긴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 친구에게 공책을 돌려주기 위해 하루종일 헤매는 어린이의 모습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하는 이란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등도 설연휴를 풍성하게 해줄 만한 수작 비디오들이다.

【이선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