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맨홀 (106)

맨홀에서 계속 불꽃이 솟아올랐다.

혜경의 몸도 더욱 긴장되었다. 쭈뼛쭈뼛 머리가 서는 듯했고 등줄기로 쭉쭉 소름이 끼쳤다.

모든 의식이 힘없이 사타구니로 흘러드는 듯했다.

주먹만한 불덩이들이 혜경의 몸 이곳저곳을 툭툭 치고 다녔다. 사타구니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등뒤로, 머리로, 다시 사타구니로. 그리고 혜경의 몸속으로 들어설 준비를 하듯 빙빙, 육체의 입구를 맴돌았다.

기운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흥건히 젖어 들었다.

액(液).

진화를 위한 액(液)이 아니었다. 윤활(潤滑)이었다.

혜경은 환철의 손가락을 떠올렸다. 환철의 손가락도 윤활이었다. 키보드와 손가락만으로 세상 모든 것을 컨트롤 할 수 있다고 믿는 환철의 손가락 하나하나가 차례로 다가들 때마다 혜경의 몸은 늘 달아오르곤 했다.

작은 불씨가 훨훨 솟구치는 불길이 되곤 했다.

절대 성급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랬다. 그 고속버스 안에서도 환철의 손가락은 천천히, 조심스럽게 다가들었다. 혜경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새끼손가락이었다.

그날 그 일을 혜경은 아직도 우연이라고 믿고 있었다.

혜경의 마지막 자존심일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환철의 새끼손가락 하나가 혜경의 장딴지 한 지점으로 스치듯 다가들었다. 온몸이 스멀거렸다. 차츰차츰 위쪽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이곳저곳에서 꿈틀대던 불덩이들의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혜경은 짧은 신음소리를 냈다. 환철의 손가락 하나가 의식을 흐트러트리기 시작했다. 잠깐이지만 혜경은 승민을 떠올렸다. 승민. 왜일까. 오늘도 환철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 때문일까. 환철이 아니라도 그 누군가에게 원할 수밖에 없다면 언제든 벗어날 수 있는 환철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 때문일까.

맨홀 속의 불길이 계속 솟아오르고 있었다. 검은 연기와 함께 하늘 높이 솟구치고 있었다. 혜경은 그 불길을 바라보며 남은 아홉 개의 손가락과 혀, 그리고 자기 몸속으로 가장 깊숙히 들어오곤 하던 또 다른 돌출 부분을 생각하며 다시 한번 몸서리쳤다.

순서가 있었다.

하지만 순서는 계획적이지 않았다.

뒤죽박죽이었다.

그 순서를 어기는 환철을 혜경은 한 번도 탓하지 않았다. 순서는 의미가 없었다. 열두 개의 도구는 혜경에게 늘 항복을 받아내곤 했다.

하지만 패배자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