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국의 정보통신연구소들이 모여 서로의 연구 개발력을 겨뤄보는 올림픽이 열린다면 한국의 대표선수는 두말할 필요 없이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 될 것이다. ETRI는 이미 64MD램 부문에서 금메달을 획득한데 이어 최근에는 차세대 이동통신의 총아인 CDMA 부문에서도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한국에서는 ETRI를 빼놓고는 정보통신을 논의한다는 것이 무의미할 지경이다.
1천7백여명 중 박사만 3백명이 넘고 한 해에 2천억원 이상의 예산을 투입하는 「대표팀 ETRI」를 지휘하는 「감독」은 양승택 원장이다. 그는 미국 공학박사에 벨연구소 연구원이라는 화려한 경력과 ETRI의 「간판 타자」였던 TDX 개발단장을 거쳐 지난 92년부터 이 「막강한」 연구기관의 총감독을 맡고 있다.
양 원장은 최근 ETRI의 간판이 한국전자통신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변경돼 화제를 모으고 있는 것과 관련, 『신규 전기통신법 발효에 따른 것으로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시스템공학연구소(SERI) 등이 산하에 편입되지만 인사 예산 프로젝트 등 기존처럼 별도로 운영될 것이다. 단지 명칭만 소(所)에서 원(院)으로 바뀐 것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ETRI를 세계 정상연구소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연구원 시절이던 80년대 후반에 이미 밝혔고 지난해 드디어 그것을 『실현했다』고 자평했다.
80년대에는 아무도 믿지 않았던 그 목표를 원장으로서 『달성했다』고 설명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양 원장은 『세계 정상연구소로 인정 받기 위해서는 무언가 계량적 측정지표가 필요했다. 그래서 93년부터 3P 프로그램과 SCI 등록을 가시적 성과물로 추진했다』고 말했다.
3P란 논문(Paper) 특허(Patent) 기술이전(Product)의 약자이다. 양 원장은 『이것은 소위 연구원 1인당 생산성을 계량화하는 것이다. 프로그램 시행 당시 사전조사를 통해 파악한 결과 3P 수치는 일본 NTT연구소가 가장 높아 역시 세계 정상임을 확인했고 목표는 이를 추월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시행 2년 만인 94년 연구논문 발표 건수는 NTT를 추월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NTT의 1.5배에 이르는 세계 최고수준에 올랐다』고 자신하면서 『단순히 연구개발만 끝내는 것이 아니라 논문을 통해 세계적으로 학술적인 인정을 받고 또 특허를 출원할 경우 로열티라는 부수입이 발생하는 장점을 3P는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양 원장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연구원 개인의 발전 및 성취와 연구기관 자체의 지향점이 서로 일치되는 일종의 「윈-윈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계량화한 근거와 더불어 질적으로도 인정 받을 수 있는 SCI 등록을 병행 추진, 연구원들의 논문을 영어로 묶은 「ETRI 저널」을 발간했다』고 한다. SCI는 미국과학기관인 ISI가 전세계 과학기술 논문집 가운데 가장 많은 인용사례를 보이는 책자를 통계, 해마다 발표한다. 과학기술 분야에서는 여기에 등록된다는 것 자체가 「영광」일 정도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양 원장은 『한해 8만∼9만개 정도가 발간되는 논문집 중에 SCI에 실리는 것은 3천개 안팎이고 특히 정보통신연구소의 논문으로는 세계적으로 IBM, AT&T, 브리티시텔레콤(BT) 정도에 불과하다』며 『ETRI 저널의 인용지표는 세계 랭킹 8∼9위에 해당하는 수준이어서 내달쯤 등록을 확신하고 있다』고 밝혔다.
물론 양 원장은 이같은 성과가 있기까지 「이런저런 소리」를 들어야 했다. 초기에는 『연구하기도 바쁜 판에 논문 쓰랴 특허 내랴 꼭 할 필요가 있는 것이냐』는 연구원들의 불평이 쏟아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정책이 본궤도에 오르면서 연구원들 대부분은 상당한 자신감과 자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양 원장은 올해 「창의성」 「독창성」 캠페인에 정성을 쏟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창의성, 독창성은 누가 가르쳐서 배양되는 것도 아니고 패배의식이나 열등감으로는 더욱 실현하기 어렵다. 내가 최고라는 자부심을 가져야 자연스럽게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창출된다. ETRI는 세계 정상수준이고 그 주역은 연구원들이기 때문에 기대가 크다』고 덧붙였다.
그는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연구 개발 고급두뇌의 대학 이동현상에 대해 『우려할만한 일은 아니다』고 밝혔다. 양 원장은 『최근 수년간 각 대학에 정보통신 관련 학과가 잇따라 개설돼 연구원들이 교수로 스카우트되는 것은 사실』이라고 지적하고 『ETRI를 거쳐 교수가 된 인력을 파악해 보니 약 3백40명에 이르고 이것은 국내 관련학과 전체 교수 총원의 거의 절반에 해당, 본의 아니게 「교수 양성소」 소리를 듣는다』고 했다.
『이 때문에 절대 숫자가 커서 인력 유출이 심각한 것으로 비쳐지고 있지만 고급두뇌가 워낙 많이 포진해 있는 ETRI 입장에서는 비율이 미미하고 그 정도는 별도 충원 없이 기존 인력의 생산성 향상을 통해 충분히 해결 가능하다』고 했다.
실제로 대학교 등으로의 이직자가 발생하고 있지만 정작 ETRI 내의 박사 연구원 숫자는 오히려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95년부터는 아예 박사가 아니면 입원 인터뷰조차 못한다.
양승택 원장은 매우 독특한 캐릭터의 소유자라는 것이 주위의 평이다. 그의 첫 인상은 해외 유학파 출신들이 그렇듯이 부드럽고 세련된 「댄디한 신사」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일에 관한 집착과 집중력이 매우 강하고 조직 장악력과 추진력 역시 「발군」이라는 인정을 받는다.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이다. 그에 관한 일화도 많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골프이지만 「기관장인 탓(?)」에 최근 수년간은 거의 즐기지 못했다고 한다.
<이택기자>
양승택원장 약력
1939년생
1961년 서울대 공대 전기공학과 졸업
1976년 미국 폴리테크닉 인스티튜트 오브 브루클린 박사
1968∼79년 벨 텔레폰 랩 연구원
1981∼86년 ETRI 선임연구부장, 연구기획부장, TDX개발단장
1986년 한국통신진흥주식회사 사장
1989년 한국통신기술주식회사 사장
1992년∼현재 ETRI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