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를 싸게 팝니다.」
언제부턴가 컴퓨터의 가격이 곤두박질치고 있다. 같은 급 컴퓨터라면 옆 매장보다 얼마라도 싸야 손님을 끌 수 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손님들 역시 싼 것을 좋아한다. 컴퓨터가 일상 생활용품으로 자리잡으면서 저급한 제품에 대해 고객들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자연히 정상적인 시스템을 가지고 보다 싸게 팔아야만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 정상적인 제품에 정상적인 가격, 이것은 유통의 기본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컴퓨터 유통업계의 풍토는 「싼 것」 일색으로만 흐르고 있다.
컴퓨터 유통업계의 가격파괴는 소비자의 입맛을 버려놨다. 제품의 품질에 맞게 제가격을 주고 사면 뒤가 꺼림칙하다. 혹시 비싸게 주고 산 것은 아닐까, 한번쯤 되새기게 된다. 주위 친구의 컴퓨터 가격과 비교하면 더욱 배가 아프다. 「어딜 가면 싸게 살 수 있다」는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번져나간다. 소비자의 요구는 갈수록 커져간다. 싸고 좋은 제품을 무의식적으로 쫓아간다.
소비자가 생각한 허상의 가격이 점점 구체화해간다. 이에 따라 조립PC업체들이 어쩔수 없이 따라간다. 팔아야만 되는 장사의 속성 상 「울며 겨자먹기」식이다. 컴퓨터 전문판매점들은 연일 광고공세를 펼친다. 「우리 매장은 얼마만큼 싸다」는 광고문구가 화려하다. 이에 질세라 경쟁판매점은 더욱 가격을 내려 소비자를 유혹한다. 어차피 소비자에 의해 가격이 결정되는 것이 시장원리라지만 상황은 「출혈」로 치닫는다. 컴퓨터의 가격경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팔면 손해인 상품이 생겨나고 평균마진 2∼5%의 박리시장이 형성됐다. 소비자가 디스카운트를 요구할 땐 이미 적자이다. 하지만 찬바람만 쌩쌩 부는 컴퓨터시장에서 한 명의 고객이라도 「단비」이다. 어떻게든 팔아야 운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비록 이익이 남지 않는 장사라도 일단 자금회전이 원활해야 경영이 가능하다. 판매점이나 조립PC업체로선 같은 상품을 매입하더라도 싼 제품을 선호하게 된다. 무조건 팔아야 하는 긴박한 사정의 업체와 자금으로 물품을 사들여 시간차 공격(?)으로 이익을 남기는 업체가 생겨났다. 또 이들 자금주의 전면에 나서 사들인 물량을 대행해 넘겨주는 얼굴마담 업체도 생겨났다. 속칭 「나카마」라는 중간 거상들이 등장했다. 이들 나카마 중에는 사업자 등록증조차 없이 그 자리에서 사고 파는 이도 있다. 그만큼 컴퓨터 관련 유통은 다단계화해갔다.
이러한 유통관행이 이른바 「꺾기」다. 먼저 대형 컴퓨터 메이커나 부품, 주변기기 메이커의 경우 용산전자상가 등으로 방출하는 물량이 방대하다. 호황일 경우 이를 소화해내는 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불경기의 경우 상황은 사뭇 다르다.
메이커로선 영업정책 상 밀어내야 할 물량이 있다. 그리고 판매점은 이를 받아서 판매해야 한다. 그러나 잘 팔리지 않는다. 경기가 침체된 상황에서 이들 판매점이나 메이커들은 일단 물량을 소화해낼 수 있는 파트너를 찾게 된다. 이 때 자금여력이 있는 대형 도매업체가 나선다. 듬직한 그룹이 배경이 되면 금상첨화이다. 어음결제에 대해선 안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파트너들은 물량을 받아 덤핑판매한다. 평균 3개월 은행이자분만큼 밑지고 판다. 심지어 원가의 15%를 밑지고 파는 경우도 있다. 이 과정을 속칭 「꺾는다」라고 얘기한다. 여기서 꺾기라는 용어가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결제방법은 현찰이다. 약 3개월에 이르는 어음을 끊고 현금으로 대금을 받는다. 3개월에 대한 이자분만 보상받는다면 외형을 늘리기엔 더 없는 기회이다.
예를 들면 첫번째의 경우 한국IPC 부도의 경우 멀티그램이 파트너가 됐다. 융통되지 않는 한국IPC의 어음을 멀티그램이 배서해주었기 때문이다. 멀티그램이 물량을 받고 이를 한국IPC에 넘겨 일선판매를 담당하게 했던 것이다. 이 꺾기물량은 채권단이 주장한 4백46억원 이상의 금액이다.
두번째의 예는 아프로만과 한국소프트정보통신, 세양정보통신의 부도에서 볼 수 있다. 세양정보통신은 전 외형매출이 1천5백억원이었다. 이 역시 아프로만과 한국소프트정보통신을 파트너로 잡아 꺾기물량을 소화해낸 대표적인 사례다. PC카드, 주변기기, 부품 등을 중소 메이커나 대리점에서 받는다. 보통 3개월 어음으로 결제하고 아프로만, 한국소프트정보통신을 통해 시중에 꺾어 판매한다. 세양의 부도금액 1천5백억원은 이러한 꺾기로 이루어진 금액이다. 당연히 외형은 커진다. 그러나 실이익은 없다. 마진은 차치하고 원가보전부분이 3개월의 현금이자로 대체된다. 경우에 따라 심하게 꺾었을 때는 손해마저 본다.
꺾기의 폐해는 무엇보다 가격질서의 혼란이다. 꺾기가 이루어진 제품은 메이커 공급가 이하로 거래되고 판매된다. 당연히 정상유통 제품을 정상가격에 판매하는 대부분의 업체는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 소비자도 의아해 하면서 싼 제품을 선호하게 되고 꺾기라는 관행은 계속된다.
한국IPC가 부도나기 전 용산전자상가에 유통된 C사의 노트북컴퓨터는 정상가격이 4백50만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론 2백30만원에 판매됐다. 컴퓨터가 아무리 이익이 많이 남는 제품이라도 이 정도면 가공할 만하다. IPC의 「마이지니」 제품은 제가격을 받고 파는 경우가 전무하다시피 했다. 꺾기를 통해 원가 이하에 판매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추세에 맞춰 H컴퓨터사는 50만원대 「1백20」 제품도 내놓았다. 1백만원 이하에선 꿈도 못꿀 제품들이 반값 이하로 버젓이 유통되고 있다.
「가격파괴」란 복잡한 유통단계의 군살을 빼고 마진을 줄여 박리다매하는 것이 이 어원의 시작이다. 좋은 제품을 싸게 살 권리는 자유경제의 기본인 만큼 「가격파괴」는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좋은 수단이다. 그러나 현재 일부 컴퓨터 관련 유통업체들의 가격파괴는 「출혈경쟁」이다. 「네가 싸게 팔면 나도 싸게 판다」는 식의 근본없는 경쟁심리가 현재의 부도국면을 만들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나진상가에서 5년째 조립PC영업을 하고 있다고 밝힌 익명을 요구한 한 사장은 『지난해 초부터 한국IPC, 아프로만, 한국소프트정보통신 등의 부도설이 끊이지 않았다』며 『사실 부도업체로서는 안된 얘기지만 무리한 꺾기로 비정상 영업을 해온 만큼 정리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결국 가격파괴를 빌미로 한 꺾기의 종말은 이번 부도사태로 표출됐다. 이들 대표적인 5개 부도업체가 얼마나 허약체질인가는 부도금액에서도 알 수 있다. 평균 부도액이 1천억원대에 이른다. 소문이 무섭게 파산되는 과정이 마치 한 편의 연극을 보는듯 하다. 가격파괴를 자랑하고 꺾기를 주요품목으로 삼은 업체들의 체질이다.
이에 대해 대다수 용산 컴퓨터 관련 유통업체들은 속이 답답하다. 전자랜드 신관 광장층에 입주해 있는 Y반도체 S 사장은 『용산전자상가의 정상화를 위해 잊을 것은 빨리 잊고 새로운 각오로 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무엇보다 제가격을 받고 정확한 제품을 판매하는 풍토 조성이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조언한다.
부품유통에서 수위를 달리고 있는 석영전자는 이번 부도에 중요한 교훈을 시사하는 업체다. 이 회사가 혼란한 시장환경 속에서도 변함없이 영업을 할 수 있는 것은 나름대로의 독특한 경영방식 때문이다. 딜러영업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정확한 채권확보를 통해야만 가능하다. 대부분 현금결제와 엔드유저를 상대로 탄탄한 판매망을 갖고 있다. 이 결과 석영전자는 지난해 매출향상은 20%선에 머물렀지만 이익은 2백30% 이상 향상되는 등 안정된 성장을 구가하고 있다.
이 회사의 박진홍 부사장은 『무리한 사업투자는 화를 부르게 마련』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또 『가격을 지키는 것은 소비자의 권리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유통, 적절한 마진, 확실한 AS를 보장하는 밑거름으로 해석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인상가 엔터컴퓨터시스템의 김동주 사장은 단순유통의 비중을 대폭 줄이고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는 기술부가영업에 치중하고 있다. 부가가치가 낮은 기존 조립PC 판매방식에서 탈피해 최근 붐을 일으키고 있는 인터넷, 네트워크 관련상품을 접목시켜 부가가치를 높이고 있다.
그는 『유통업에서 성공하기 위해선 「싸면 잘 팔린다」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기술이 가미된 상품을 적극적으로 개발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지난 해부터 단순 PC유통에 웹서버 구축, 홈페이지 제작, 기업 네트워크 구축 등의 아이템을 접목시켜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딜러유통은 자제하고 최종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직판영업의 비중을 강화했다. 95년 20%에 머물렀던 대고객 판매비중을 지난해는 35%까지 높였으며 올해는 50% 이상으로 끌어올릴 방침이다.
중견 컴퓨터 관련 유통업체들의 연쇄부도는 이미 오래 전부터 예견된 일이다. 편법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대규모 회사로 키우겠다는 경영자들의 야욕이 부도의 빌미를 제공했다. 무리한 사업확장으로 자금이 필요하게 되고 자금확보를 위해 이들 회사는 덤핑을 일삼았다. 잦은 덤핑행위로 적자폭은 갈수록 커지고 임시방편으로 적자를 메우기 위해 또 덤핑을 감행했다. 결국 이들 회사는 「시장확대를 위한 덤핑」이 아닌 「살아남기 위한 덤핑」을 해왔다.
「왜곡된 유통.」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나라 사람은 지나치게 머리가 좋아 기상천외한 유통형태를 만들어내고 그 수에 자기가 빠져 결국 패망의 지름길로 들어선다』고. 「큰 덩치」 「빠른 성장」만을 향해 달리는 무리한 기업운영이 낳은 결과가 지금 생생히 재현되고 있다.
<이경우, 최정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