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살롱] 이병기 서울대 교수

얼마 전 언론의 인물 동정란에는 작은 기사가 실렸다. 이병기 교수(서울대 공대 전기공학부)가 국제 전기전자공학회(IEEE)의 펠로(Fellow)에 선임됐다는 내용이었다.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기사였지만 전자분야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실이 전세계적으로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 교수가 과연 어떤 인물인지 화제가 됐다.

IEEE는 미국 뉴욕에 본부를 둔 회원 35만명의 세계 최대 학회이다. 회원, 선임회원, 펠로로 등급이 나뉘어 있고 최고 등급인 펠로는 전기 전자 컴퓨터 및 관련분야 내 특정 주제에 대해 현저한 공적이 있는 사람을 추천받아 8개월에 걸친 엄격한 심사를 통해 최종 선정한다.

-전자분야 최고 권위인 IEEE 펠로는 학자 개인의 영예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한국의 연구 수준을 인정받는 계기가 되고 특히 40대에 선임된 것도 화제인데 소감은.

우선 우리나라의 연구 수준이 국제 수준에 근접했다는 상징적인 평가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기쁜 일입니다. 40대에 선임됐다는 것은 50∼60대의 선배 학자들이 초창기 우리나라의 대학과 산업계의 기틀을 잡는 어려운 일을 감당해 주셨고 그 기반 위에서 나름대로 전문분야를 심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때문에 앞으로는 더욱 많은 국내 중견학자들이 펠로에 선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국내 학자 중 IEEE 펠로에 선임된 것은 안수길 서울대 명예교수를 비롯, 서정욱 한국이동통신 사장, 조장희 과학원 교수 등 7명이었고 이들은 모두 50대 이상이다.

-권위 만큼이나 심사가 까다로운 것으로 알려졌는데 구체적인 공적 사항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크게 3부문에서 추천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는 「LEE의 알고리듬」으로 학계에 알려진 「디지털 변환과 필터링」이고 「메트로 버스 채널 프레임화」로 대표되는 「광대역 정보통신」입니다. 또 「디지털 스크램블링」도 인정을 받은 것 같습니다.

이 교수가 지난 84년 미국에서 발명, 학계와 산업계에는 그의 이름을 따 「LEE의 알고리듬」으로 알려진 기술은 radix-2 DCT(고속 이산 여현변환)를 고속으로 계산할 수 있는 알고리듬이다. 그 이전까지 계산 복잡도의 최선이었던 「Chen의 알고리듬」을 절반 가량 줄인 획기적인 것이었고 그의 또다른 발명작인 「소인수 분해 알고리듬」과 함께 오늘날 영상 및 음성 처리에 가장 크게 기여한 변환기술로 평가 받는다.

「광대역 정보통신부문」에서는 이 교수가 최초의 동기식 광전송시스템인 메트로 버스의 「채널 프레임화 시스템」을 정의하는 기초를 발표, 현재의 광대역 정보통신 틀을 세우는 역할을 했다. 특히 그는 관련 특허 3개를 갖고 있고 지난 93년에는 몇몇 동료들과 자신의 이론을 포함한 「광대역 정보통신기술」이라는 영문서적을 저술, 지금까지 스테디셀러로서 명성을 높이고 있다.

「디지털 혼화」 기술에 대해서도 이 교수는 신호정렬이론, 수열공간 및 수열 발생기에 관한 이론들을 체계적으로 확립, 이 분야 연구에 신기원을 이룩한 것으로 인정 받는다. 물론 그는 이 분야에도 프랑스 영국 일본 등에서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그같은 연구개발 성과, 특히 특허 보유와 관련해서는 산업계의 사용 요청이 많았을텐데요

솔직히 연구가 전부인줄만 알았기 때문에 특허 문제를 소홀히 했습니다. 또 아직도 미국 벨 연구소에 재직하고 있다면 특허권을 요구할 수 있는 몇몇 기술이 있습니다.

이 교수는 특허와 관련한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했다. 『지난 88년 ETRI에서 우연히 프랑스에서 날아온 공문을 보여주었는데 거기에는 「LEE의 알고리듬」을 사용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공문을 보낸 장본인은 유럽 최대의 반도체 회사인 SGS 톰슨이었고 그의 이론을 이용해 칩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기업체와 대학간에 산학 협력에 관한 모습이 많이 변한 것 같습니다. 예전과는 달리 기업이 이니시어티브를 쥐는 상황인 것 같은데. 엄밀한 의미에서 기업이 프로구단이라면 대학은 아마추어구단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종전에는 연구개발 관련 인적 물적 자원이 대학이 우세했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우리나라에도 세계적인 기업이 대거 탄생했고 인력이나 축적된 노하우도 대단합니다. 제품 개발력 차원에서는 대학이 기업의 수준을 능가하진 못한다는 겁니다. 앞으로는 대학은 새로운 개념이나 알고리듬 연구에 주력하고 개발부문은 기업이 담당하는 역할분담체제로 갈 것입니다.

-21세기 정보화사회로 진입한다면서도 우리 사회 내에는 아직 산업사회의 티를 벗지 못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과학자로서 정보문명을 올바로 받아들이기 위한 우리 사회의 자세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엔지니어로 통칭되는 전문가를 인정해 주는 사회적 토양을 배양하는 것이 시급합니다. 엔지니어는 기술을 기반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입니다. 비단 기술적인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여타 사회 현상에도 이렇게 훈련된 사람들의 시각과 의견은 대단히 유용하지만 인문사회계통 인력에 비해 사회적 비중은 너무 가볍다는 생각입니다. 엔지니어를 제대로 활용하는 사회적 성숙도가 아쉽습니다.

이 교수는 국내 대학의 교육 및 연구 수준을 MIT나 스탠퍼드처럼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고 유일한 취미는 암벽등반이지만 다른 「바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요즈음은 통 즐기지 못한다고 했다.

<이택기자>

이병기 교수 약력

1951년 출생

1974년 서울대전자공학과 졸업

1978년 경북대 전자공학과 석사

1982년 미국 UCLA 공학박사

1984∼86년 미국 AT&T 벨 연구소 연구원

1986년∼현재 서울대 전기공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