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논단] 감정지수를 높이는 정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떠들썩하고, 심지어는 「한보사건」을 은폐하기 위한 의도로까지 의심을 받으며 온 나라와 언론이 황장엽 노동당 비서로 인해 설왕설래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평양시내는 황장엽의 망명사실을 모른 채 김정일의 생일행사 준비에 분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새삼스럽게 정보가 지닌 의의를 실감케 된다. 정보를 지배하는 자가 국가를 지배한다는 사실을 이보다 더 웅변으로 말해 주는 사건도 드물다 하겠다.

그런 정보결핍이 사람들로 하여금 올바른 판단을 불가능케 하고 정보를 지배하는 개인 또는 집단에게 종속당할 수밖에 없게 하는 반면, 표면적으로는 정보과잉의 상태인 듯하지만, 실상 정보결핍 못지 않게 능동적인 판단을 불가능케 하는 사태도 없지 않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필자 자신 아침이면 거의 모든 조간신문을 훑어보곤 하지만, 대개가 비슷비슷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고, 간혹 눈길을 끄는 기사들도 읽고 나면 읽으나마나 하거나 공연히 시간을 낭비했다고 얼굴을 붉히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텔레비전의 경우도 대동소이하다. 아니, 좀더 형편이 좋지 않다고 해야 정직할지 모른다. 저녁식사후 좀 쉬고 나서 밀린 책읽기에 손을 대보겠다고 하다가도 이 채널, 저 채널 돌려대느라 자정을 넘기는 때가 없지 않으니 말이다. 유선방송이 들어온 후 볼거리가 늘어난 것은 분명하지만, 정말로 유익했다든지 흥미로웠던 프로그램은 그리 흔치 않다. 혹시 그런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난 후에라도 그것으로 만족하고 전원을 꺼버리는 것이 습관화되지 않았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 될 듯하다.

읽을만한 책들이 변변치 못하던 중학생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읽게 된 책의 뒷부분이 궁금해 광화문 네거리의 숭문사로부터 집이 있는 숭인동 근처 책방에 이르기까지 큰 길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읽다가 책방주인들로부터 꾸중이랄까 핀잔을 듣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정보혁명을 겪고 있으면서도, 그 정보의 홍수 속에서 참으로 필요하며 유익하고 흥미로운 알곡들을 찾아내는 학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부끄러운 증거가 이렇게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게를 잡아주기보다는 게를 잡는 통발을 마련해 주고 그 사용방법을 일러주라는 옛말이 있지만, 이는 오늘날 참으로 절실하게 요청되는 교육의 핵심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가 정보량을 미리 제한해야 한다거나, 정보내용을 사전에 검열해야 한다는 주장에 조건없이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자라나는 세대의 경우, 겉으로 드러난 욕구와 건전한 성장을 위해 실제로 더욱 절실하게 요청되는 필요를 구별해낼 수 있는 능력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가급적이면 인격적인 성장에 결정적으로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 시행착오를 통한 자기학습이 어쩌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와 같은 교육이 학교라는 제도를 통해 충족될 수 있다고 보지 않기에 우리는 가정과 사회의 교육역량이 전체적으로 신장돼야 한다는 주장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특히 핵가족화된 가정이 지닌 문제들을 심각히 고려하게 되고, 지역사회의 문화역량을 제고하려는 노력들을 값진 것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살던 단독주택을 이른바 원룸아파트형의 다세대주택으로 바꾸고 나서 입주자들 중 어쩌다가 끼어든 대책없는 청년과 그의 또래들로 인해 마음고생을 겪으면서 그 부모들이 원망스럽게 느껴지기도 하는 개인적인 경험때문에 이런 푸념을 늘어 놓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높은 지능지수만을 좋게 평가하는 세태에까지 원망이 옮겨간다. 그나마 지수에 대한 관심이 사회 일각에서 일고 있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정보에서도 그와 같은 측면이 고려됐으면 한다. 그래야만 정보 역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원천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한국문화정책개발원 원장, 서울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