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러시아 전자시장을 조국인 독일시장과 동일시하고 있다』 이런 장담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독일 지멘스 그룹의 러시아 전자시장에서의 약진은 다른 외국업체가 흉내낼 수 없을 만큼 대단하다.
지난 93년 변화된 러시아 시장에 본격 진출한 지멘스는 97년 1월 현재 11개의 합작법인을 러시아 각지에 세워 가동중이고, 올들어서는 특히 우즈베키스탄공화국과 카자흐스탄공화국 등 러시아주변 독립국가연합의 다른 나라들에도 활발하게 진출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들 지역의 전자시장이 전부 지멘스의 독무대로 변할지 모른다는 전망까지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전자산업분야 가운데 지멘스가 러시아에서 가장 강세를 보이는 분야는 대단위 공단의 자동화시장. 러시아 중부 볼가강 유역의 산업지대인 니주니 노브고로트의 에너지산업공단을 위시해 그 인근의 제르진스크 에너지공단 등 대형공단들이 자동화를 서두르면서 지멘스의 기술을 빌리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페테르부르크와 칼루가 지방의 대형 터빈생산업체들도 대부분 지멘스의 수중에 사실상 들어갔다. 칼루가 터빈생산공단은 주식의 20%를 지멘스가 직접 획득, 대주주가 됐다.
자동차분야뿐만 아니라 광통신분야에서도 지멘스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다. 국가주도의 광통신설비 매설사업을 주관하고 있는 국영기업인 러시아 텔레콤의 광통신설비 매설 프로젝트에 지멘스는 반드시 단골손님으로 등장하고 있다. 지멘스는 광통신분야에서 직접 프로젝트를 수주하거나 투자가로 나서고 있다. 지멘스는 또 이제프스크市와 페르미市에 합작공장을 세워 통신장비 생산을 서두르고 있기도 하다. 이밖에 러시아 현지에 금속 콤비나트들과 제휴해 이 분야에 진출을 도모하고 있다.
『우리는 러시아시장을 우리나라의 국내시장과 차별하지 않는다. 때문에 우리는 당장에 눈앞에 보이는 수익보다는 장기적인 투자를 모색하고 가급적이면 현지의 생산설비를 기반으로 해서 러시아업체들과 공동생산을 선호하고 있다』고 지멘스 모스크바대표부의 한 직원이 말했다. 올해 지멘스가 독립국가연합 지역에서 벌이고 있는 가장 큰 사업은 우즈베키스탄의 TV장비들을 자사 제품으로 전부 교체하는 프로젝트다. 지멘스의 오스트리아 자회사가 맡고 있는 이 프로젝트는 2억 마르크 상당의 대규모 사업으로 우즈베크의 수도인 파슈켄트의 TV중계센터와 라디오 방송시설, 우즈베크 전역의 TV스튜디오가 전부 현대식으로 바뀔 예정이다.TV방송에서 고밀도 고영상 시대를 열고 라디오 방송분야에서 스테레오방송을 실시하기 위해 우즈베크의 국영방송국이 의욕적으로 벌이고 있는 이 사업은 2000년까지 계속되며, 이같은 새로운 계획을 위해 우즈베크공화국은 지멘스의 요구대로 이미 TV표준을 종전의 프랑스식 세컴(SECOM)에서 독일방식인 팔(PAL)로 바꾸어 놓은 상태다. 지멘스는 우즈베크에서의 성공을 계기로 중앙아시아 지역에 더 활발히 진출하기로 하고 다음 공격목표를 카자흐스탄으로 정해 놓고 있는데, 카자흐스탄의 TV장비시장은 지멘스의 터키 자회사를 통해 파고들 예정이다.
그런데 지멘스가 러시아시장에서 괄목할 성공을 거두는 데는 그만한 사정이 있다. 이 독일 그룹이 러시아에 처음 진출한 것은 사회주의 혁명 전인 1855년으로 그 뒤 러시아를 거쳐 유럽과 인도를 잇는 전산망 건설사업으로 큰 돈을 모은 적이 있다. 그러다가 1913년에 외국기업의 재산을 몰수하는 사회변동기에 재산을 러시아정부에 빼앗겼다. 그러나 러시아 시장에의 미련을 버리지 못해 후르시초프의 개방정책을 타고 일찌감치 1969년에 2명의 직원을 파견해 모스크바에 대표부를 새로 열었다. 이 회사는 이어 1980년대 말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시장진입을 조심스럽게 타진한 데 이어 1993년 이후 본격적으로 시장공략에 나서 지금은 본부격인 모스크바대표부에만 2백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있다.
한편 지멘스 그룹은 최근 체코의 프라하에서 열린 그룹회장단 회의에서 지멘스의 세계시장에서 동유럽이 차지하는 비율을 5%라고 발표하고, 이 가운데 절반이 러시아시장에서의 수익이라고 공개한 적이 있다. 이 그룹의 폰 피레르 회장은 『동유럽에서 수익을 더욱 증대시킬 계획』이라고 밝히고 『이를 위해 우선 러시아와 동유럽에 앞으로 4, 5년 동안 각각 5억 마르크를 더 투입할 계획』이라며 의욕을 보였다.
그러나 지멘스의 모스크바대표부 관계자는 『러시아의 불확실한 법적, 제도적 장비들이 우리 그룹의 투자의욕을 감퇴시킬 수도 있다』고 전하면서 『독일과 오스트리아 은행들의 재정담보를 조건으로 우즈베크 등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더 진출할 가능성도 높다』고 전망한다.
<모스크바=김종헌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