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맨홀 (148)

진기홍 옹은 다시 요람일기로 시선을 돌렸다.

천(天), 지(地) 각 권으로 된 국한문 혼용 필사본.

하지만 인(人)권은 아직 찾을 수 없었다. 천(天)권과 지(地)권을 찾는 데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일기의 내용으로 보아 인(人)권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되고 있었다.

요람일기의 천(天)권은 서문과 본문으로 나뉘어 있다. 서문에는 전신을 비롯한 전화의 중요성과 유래, 전설과 설치 당시의 문화적인 배경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고, 본문에서는 1904년 2월 8일부터 일본과 러시아가 조선정부의 통신시설에 대한 피탈과정이 일기체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철영(金澈營).

진기홍 옹은 요람일기를 바라보며 일기를 붓으로 직접 쓴 김철영을 생각했다. 전기통신의 선각자.

김철영은 우리나라 최초의 전기통신시설이었던 인천과 서울, 의주간을 연결한 서로전선의 개통(1885년)과 때를 같이하여 전보학생(電報學生)으로 선발되어 일찍이 통신에 입문했다. 한성전보총국에서 전신업무를 실습하였고, 1887년 전보학당을 졸업과 동시에 조선전보총국 위원에 임명되어 서울과 공주, 전주, 대구, 부산간을 잇는 남로전선의 건설에 참여하였다.

이어 동래 분국의 전무위원으로 임명된 김철영은 1893년 전우총국 위원, 1894년 공무아문 주사(주임관), 1895년에는 농상공부 기사(技師), 1900년에는 통신원 기사, 1904년에는 통신원 체신과장에 임명되는 등 기구의 개편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전기통신사업에 종사하였다.

명성황후 국장 때에 농상공부 기사로 있으면서 전화기거행조(電話機擧行條)로 말 한필을 상으로 받기도 했던 김철영은 근무중 시종일관 반일태도로 인하여 일본인에게 기피인물로 지목, 1907년 고종 폐위에 대한 매일신보 호외사건 때에 귀양을 가야만 했다.

김철영이 근무하던 궁내부(宮內府) 통신사는 궁내의 통신시설을 관장하던 곳으로, 1905년 한일통신협정에 의해 통신권이 피탈된 때에도 특별규정을 두어 궁내부 소관으로 남겨두었는데, 그곳에 근무하던 통신인들은 통신의 특성상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었고, 그 정보를 당시 항일신문이었던 대한매일신보의 베델과 민족진영에 제공해주곤 했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을 트집잡아 일본은 고종황제를 퇴위시키려는 공작을 꾸미고 있었다. 이것을 안 궁내부 통신사의 김철영과 직원들은 이 사실을 베델에게 알려 주었고, 베델은 호외로 이 사실을 보도, 이에 격분한 군중들이 일본 경찰과 거류민을 공격하여 30여명이 죽고 다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