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 경제난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다양한 처방들 가운데 가장 관심을 끄는 대목은 연구개발(R&D) 투자에 관한 것이다.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는 확실한 저축으로 연구개발이 으뜸을 차지하고 있다는 얘기다.
미국이 정보통신을 중심으로 한 세계 전자산업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철저한 기술자립과 기술우위, 기술창조 활동에 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경제가 처해 있는 불황이란 긴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확실한 처방은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는 연구개발에 대해 개선할 부분을 찾아 보완해 나가는 것이다.
지난 40여년간 미국의 학교와 산업현장에서 정보통신분야의 첨단기술을 연구해온 蔡洙寧 박사(삼성전자 정보통신연구소 소장)가 그동안 보고 느낀 경험을 토대로 제시한 기술개발 전략중심의 정보통신산업 경쟁력 제고방안을 특별기고로 게재한다.
<편집자>
미국 연구기관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창조성이다. 교육시스템도 창조성을 자극할 수 있고 학습할 수 있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토론을 통한 결론 유도식의 방식을 도입하고 있다. 이것이 산업계의 연구소 문화에 그대로 옮겨와 그들의 연구소 운영 제1원칙으로 삼고 있다. 창조성 중시의 경영을 표방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연구소 운영에 대한 정책이 자율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흔히 연구원들은 꿈을 먹고 산다고 한다. 이 때문에 연구소 운영의 기본원칙은 꿈이 실현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 주고 연구관리도 그것을 북돋워줄 수 있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 통제 위주의 운영보다는 창조성을 자극하는 토론과 대안제시에 중점을 두고 지원체제도 사전 서비스 위주로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연구원의 자세다. 연구원은 자기에게 맞는 일, 자기가 좋아하는 일만 할 수 없다고 본다. 자기 전공지식과 맞아떨어지는 일만을 하기 바란다면 국내기업 연구개발 환경에서는 어렵다고 본다.
연구원은 자기가 배운 분야와는 꼭 맞지 않더라도 도전하는 자세로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극히 유행하는 기술만 좇게 되면 조로할 수 있고, 원천기술도 맛볼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목적이 분명하면 연구원은 목표에 도전해야 하고 무엇인가를 이루어내야 한다.
특히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해외에서 영입한 젊은인력들의 활용이다. 모두가 우수한 인재들이고 필요한 사람들이다. 문제는 어디에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관건인데 상황에 따라 다를 수는 있겠지만 거의가 연구관리직으로 역할이 바뀌어 버리고 있다. 소위 「결재」하는 자리에만 앉아 있다는 것이다. R&D 인력으로 영입됐으면 연구하고 개발하는 분야에서 일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또한 이들 인력이 기업의 연구소보다는 대학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우리 연구환경, 풍토가 아직까지 선진국과 비교할 때 많이 뒤떨어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것은 더 우수한 실무형 인재들을 기업의 연구개발 분야로 영입해 올 수 없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여기에 연구원의 자세 못지않게 연구환경을 얼마나 잘 조성해 주느냐 하는 것도 기술개발에 있어서 중요한 결정변수다. R&D 인력의 효율적 활용을 위한 연구전문직제도, 다른 경영활동과 차별화된 연구개발의 평가시스템, 연구원의 사기를 극대화할 수 있는 사내 벤처제도, 선진사엔 보편화되어 있는 스톡옵션제도 등은 연구환경 측면에서 개선되어야 할 이슈들이다.
정보통신분야는 육감과 직감에 의한 사업이라기보다는 철저히 과학과 기술에 의존하는 사업이다. 따라서 기술개발 활동이야말로 사업의 근간을 다지는 초석이다.
오늘날 AT&T(현 Lucent)가 세계 정보통신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Bell Labs와 같은 우수한 연구소를 가지고 있어서다. 하루에 1건 이상 특허가 나오고 있는 연구소다. 우리 기업들도 급변하는 세계정보통신 무대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연구개발 체계, 체제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우수한 인재들이 일하고 싶어하는 조직으로 만들어 가는 일, 창의적인 분위기에서 일할 수 있도록 제반 운영시스템을 바꾸는 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적 사명에 젖어 있는 실력 있는 연구원이 있는 연구소를 갖춰야만 우리의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다.
우리 기업들이 Bell Labs와 같은 연구소로 모습을 바꾸기는 어렵겠지만 외형만 번드르한 속빈 강정보다는 연구원의 의욕과 패기가 살아 있고 짜임새 있는 알찬 연구소가 우리 기업들에 필요한, 바람직한 연구소상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꾸어 나가는 일이야말로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시해야 한다고 본다.
이제 국내의 연구개발 환경도 점차 국제화하고 있고 일부 기업에서는 해외 연구소 설립을 통해 현지에서 기술, 제품을 개발하는 소위 국제적인 R&D를 추구하고 있다. 전적으로 옳은 방향이다. 현지의 우수한 인력, 기술, 인프라를 저렴한 비용으로 활용하여 핵심기술 확보는 물론 해외시장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는 전략이야말로 우리 경제를, 우리 기업들을 한단계 더 도약시킬 수 있는 방법론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수한 인력을 얼마나 많이 보유하고 있느냐와 그 인력들의 마음가짐이 어떠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를 점쳐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과학기술에 관한 한 21세기에 대비하여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작하고 점검해야 한다. 연구개발의 주체가 되는 과학기술자들의 역할과 몫이 그 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다.
국내 정보통신시장은 내년을 기점으로 완전 개방된다. 정보통신시장 개방에 대비하여 정부는 지난 수년간 제2, 제3 국제전화 사업자 선정, 시내전화사업에의 신규참여 허용, 장비 제조업체의 서비스 사업참여 허용 등 일련의 조치를 취해 왔다. 이는 정보통신 서비스 및 장비 제조업체로 하여금 종래의 독과점 시장환경에서 점차 개방경쟁체제에 걸맞은 체질을 유도하기 위한 시책이었다고 이해된다.
향후 국내 정보통신 관련업체들이 맞게 될 경쟁환경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도전임에 틀림없을 것이며 국제적으로 보더라도 미국, 영국 등 일부 경쟁체제에 익숙한 소수의 기업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세계 기업들은 실로 일대 혼돈상태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21세기를 눈앞에 둔 오늘의 시점에서 요구되는 세계 정보통신산업의 문화와 논리는 간단히 말해 다른 여타 산업에서와 마찬가지로 「경쟁」의 문화이며 「시장」의 논리다. 시장에서의 경쟁을 통한 적자생존은 사실 자본주의 본래의 철학이며 국내 정보통신산업은 그 바람을 맞게 될 가장 선두에 서있는 산업이다. 경쟁을 통한 시장논리 속에서 살아남고 발전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기업이든 개인이든 남이 쉽게 모방할 수 없고 지속적으로 시장경쟁력을 담보할 수 있는 자기만의 고유한 힘을 확보해야 한다. 요즘 많이 논의되고 있는 핵심역량(Core Competence)이라는 개념이 바로 그것이다.
정보통신산업,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통신기기시장을 보면 우리 기업 대부분이 여전히 「관납적」 사고의 틀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 통신기기산업에서의 관납적 사고란 기술 및 산업발전의 방향은 정부가 떠맡아 고민해서 설정하고 민간 기기업체는 그 결과물로서 정부로부터 나오는 요구사항과 기술발전 방향 속에서 운영효율의 극대화만을 지향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을 의미한다.
결국 이는 통신기기사업에서 제일 중요한 성공요인은 주어진 규격에 잘 맞추어 빠르고 싼 가격에 납품하는 것이라고 보는 사고방식이며, 실제로 지금까지 매우 중요한 성공요인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대로 오늘 및 향후의 세계시장에서는 이러한 관납적 사고방식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즉 기업 스스로가 새로운 기술발전을 선도하고 경쟁적 시장논리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개방화, 국제화된 새로운 기업환경에서는 지속적 성장은커녕 존재 자체가 위협을 받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각 기업 스스로가 차별화된 핵심기술과 핵심역량을 확보하도록 모든 자원과 경영능력을 집중해야 함은 물론이고, 이 과정에서 정부의 역할은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중요한 정부역할이란 국가 차원의 기초과학 투자와 상품화 기술의 전 단계에 위치하는 핵심기술 개발에 있다. 그 무엇보다도 정보통신산업, 특히 통신산업은 유행을 따라 변천하는 산업이 아니고 과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산업이다. 반도체사업의 예를 들면 극단적으로 말해 대규모 생산설비에 투자할 재원이 있는 기업이라면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는 사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생산설비를 확충하여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고 고숙련 노동력을 통해 수율(Yield Rate)을 높이는 것이 핵심적 성공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으나 기초화학 및 신소재 개발능력, 그리고 보다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비메모리 칩의 설계능력이 없이는 지속적인 경쟁 우위을 유지할 수 없다. 트랜지스터의 개발, 무선전파 영역의 확대, 디지털 기술의 보급, 광소재의 응용 등 통신산업 발전의 역사가 웅변하듯이 기초과학의 뒷받침 없는 통신산업의 중장기적 발전 역시 불가능하다고 본다. 제한된 자원으로 이윤을 창출하고 다시 이를 재투자해야 하는 우리나라 기업환경으로 볼 때 선진국 수준의 기초과학 투자를 기업의 모두 부담하는 기대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또한 핵심기술 개발과 확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나 그 과정에는 수 많은 시행착오와 물적 인적 리스크가 따르게 마련이다. 미국, 일본, 유럽 등 기반기술의 역사가 깊고 거기에 투입할 수 있는 물적 인적 자원이 비교적 풍부한 선진국에서도 기간통신이나 우주항공 등 기술선택의 리스크가 비교적 큰 산업부문에서는 정부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일례로 미국 제약업의 경우 새로운 의약품 개발에 드는 막대한 연구개발투자를 보상해 주는 정부차원의 장치로서 신약에 대한 일정기간의 법률적, 독점적 수익권을 보장해 주는 경우가 있다. 그럼으로써 정부는 기업의 벤처 마인드를 키워가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무선통신기술의 방향을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기술로 결정하는 과정에서 정부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과연 개별기업이 그 결정의 리스크를 고스란히 안을 수 있었는지 하는 점에서다. 정부는 국내에서의 수요를 담보로 미래시장의 불확실성을 줄여준 것이다.
결국 기업의 산업기술 선도노력은 시장경제에서 살아남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정책으로 나타나야 한다. 특히 위에서 지적한 바 대로 국내 대기업들은 이미 새로운 기술에 과감히 도전해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 다만 아직도 인적, 물적 기반이 취약한 국내 기업의 일반적 현실을 고려해 보면 국가차원의 자원 집중과 리스크 분담이라는 측면에서 정부의 중재자 역할은 여전히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부분임에 틀림이 없다.
<蔡洙寧 삼성전자 정보통신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