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남짓 남은 21세기. 다가올 새로운 세기에도 전자산업은 중추산업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우리 가전산업이 현재 흔들리고 있다. 소형가전산업의 제조기반은 크게 취약해지고 있으며 백색가전의 수익성은 날로 떨어지고 있다. 게다가 아날로그가 퇴조하고 디지털로의 새로운 이행은 「전통 가전」의 취사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특히 세계화 강풍은 수출전선은 물론 내수시장에까지 불어닥쳐 다국적군들의 전쟁터로 만들어 놓고 있다. 「21세기 세계 톱브랜드 진입」을 목표로 하고 있는 국내 가전산업의 대들보인 전자3사조차도 이처럼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딜레마에 처하고 말았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기술, 국경 없는 경쟁 등의 「도전」에 대한 응전방식에 따라 기업체는 물론 산업의 사활이 판가름나게 됐다. 정보가전화라는 대세앞에서 끊임없이 요구되는 구조조정. 그것은 가전업계의 어제는 물론 오늘 그리고 내일의 화두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21세기로 가는 길목에서 가전업계가 처한 환경변화를 살펴보고 해결해야 할 당면과제 등을 모색, 총 18회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
우리나라에서 소형가전제품을 생산하는 업체는 줄잡아 5백개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업체당 종업원을 30명 선으로 잡아도 1만5천여명이 소형가전에 매달려 있는 셈이다.
이러한 비유는 우리나라 소형가전산업이 외산 유명 브랜드의 시장잠식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면서 고사 직전으로까지 몰리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실감할 수 있다.
외산 소형가전은 면도기, 다리미, 모발건조기(헤어드라이어)와 같은 생필품을 비롯 커피메이커, 주서믹서, 토스터, 핸디형 청소기 등 주요 제품분야에서 이미 국산의 기를 꺾어놓았으며 이로 인해 문을 닫거나 전업하는 업체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실제로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국내 생산업체수가 20여개에 달했던 전기면도기의 경우 지금은 10군데도 안된다. 필립스, 브라운, 내셔널 등 외국의 유명 브랜드에 성능과 디자인, 그리고 최근들어서는 가격경쟁에서까지 완전히 밀려난 대표적인 품목이다. 외산품의 시장점유율도 해외여행 때 반입하는 것 등을 포함해 90%를 훨씬 넘는다는 게 업계 추산이다.
전기다리미도 비슷한 상황. 필립스가 주도하는 외산제품의 공세에 코발트전기, 국제전열, 삼신 등 2,3개 업체가 바람막이를 하고 있으나 역부족이다. 현재 외산품의 시장점유 비중이 70% 안팎으로 확대됐으며 이런 추세대로라면 3년내에 국내 다리미시장의 90% 이상을 외산 브랜드에 내놓아야 할 판이다.
요즘 신세대 주부층을 중심으로 급속히 시장수요가 확대되고 있는 커피메이커는 초기부터 외산품이 장악해 온 제품이다. 커피메이커는 국산품 시장경쟁에 외산품이 뛰어들었다기보다는 외산 브랜드간 경합을 통해 시장이 커지고 여기에 LG전자와 삼성전자가 개발, 중소업체에서 생산하는 방식으로 가세했다가 사실상 실패한 케이스. 현재 2,3개 업체가 커피메이커를 생산하고 있지만 연간 1백만여대 규모로 확대된 시장을 외산품이 거의 독식하고 있다.
외국업체들이 최근 국내시장 공략의 새로운 품목으로 지목하고 있는 헤어드라이어, 주서믹서, 토스터 등의 소형가전제품도 시장장악이 시기만 남겨놓았을 정도다. 그나마 전기보온밥솥만 국산품이 체면을 유지하고 있으나 이것도 오는 99년부터 수입선 다변화가 해제되면 「일제」라는 난관을 피하기 어렵다.
국산 소형가전제품이 이처럼 외산 브랜드에 맥을 못추는 이유는 성능, 디자인, 가격 등 여러 측면에서 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지경에 이르게된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생산 규모의 영세성」에 연유하고 있다. 우리나라 가전산업의 대들보라고 하는 가전3사는 그동안 소형가전을 구색상품 차원으로 운영해왔을 뿐 아니라 요즘들어선 하나둘씩 손떼는 분위기다. 또 중소가전업체들은 상당수가 가전3사만 바라보고 주문자상표부착방식(OEM)의 조립생산에 연연, 생산규모나 기술력 등에서 국제경쟁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유닉스전자, 우림전자 등 극히 일부 업체만이 자가브랜드로 시판하고 수출에 나서는 등 고전분투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비해 외국업체들은 이미 생산기지를 중국, 동남아와 같은 저임국으로 옮겨 대규모 생산능력을 갖춤으로써 언제든지 저가경쟁에 가세할 준비가 돼 있다. 오래 전부터 세계시장을 무대로 디자인과 품질력을 인정받아 확고한 브랜드 인지도를 갖고 있는데다 가격경쟁에서까지 우위를 확보한 제품과 국내 소비자들을 상대로 근근이 살아온 제품간 시장경쟁은 달걀로 바위 치는 모습과 똑같다는 이야기다.
<이윤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