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구조의 변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전속대리점 중심의 가전유통 구조가 다양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은 곧 전자3사를 비롯한 가전 메이커들의 입지약화를 의미한다. 유통구조가 다양화되면서 유통파워가 커지면 가격결정권은 자연스럽게 생산자에서 판매자로 옮겨가고, 제품은 소비자에 앞서 유통단계에서 먼저 평가받아야 되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가전유통 구조의 변화는 지금까지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진행될 것으로 예상돼 21세기를 맞는 가전메이커로선 상당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리딩 3사는 전속대리점망을 구축해놓고 20년 이상 누려온 「짭짤한 재미」를 더이상 맛볼 수 없게 됐다.
철옹성과도 같은 리딩3사의 전속대리점 체제에 가장 먼저 도전장을 낸 곳은 전자랜드. 지난 80년대 후반에 용산전자상가가 조성되면서 처음으로 등장한 가전양판점이다. 이 당시만 해도 리딩 3사는 전자랜드의 탄생에 대해 애써 의미를 축소하는 한편 가전제품도 직접 공급하지 않았다. 또 유통경험도 전무한데다 전자산업 기반도 없이 출발한 전자랜드가 얼마 동안이나 버틸 수 있겠냐 하는 게 리딩 3사 유통 관계자들의 시각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 양판점의 경영방식을 철저하게 분석한 전자랜드는 판매장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기세를 보였으며 결국 리딩 3사 모두와 거래코드를 개설했다. 그리고 지금은 대우전자의 실질적인 자회사인 한신유통의 하이마트와 함께 양대 전자양판점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달 말에는 재고품 전문판매장(1호점)까지 개점할 예정인 등 유통다각화를 꾀하고 있다. 전자랜드는 이제 출범 당시와는 달리 리딩3사가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바뀐 것이다.
최근에는 프라이스클럽, 킴스클럽, 까르푸, 마크로 등 국내외 대형할인점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가전유통시장이 보다 다양화, 지능화하고 있다. 이들 할인점들은 식음료와 생활용품, 의류 등을 주로 취급하는 종합판매장인데 든든한 자금력과 유통 노하우를 바탕으로 가전제품을 공장도가격 이하로까지 판매하면서 소비자들을 유인하고 있다. 동네마다 하나씩 들어가 안면과 친분으로 장사해온 리딩3사의 전속대리점과는 그 규모나 경영방식 등 모든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또 이러한 대형유통점들은 계속 늘어날 전망인데다 오는 99년 수입선 다변화 제도 해제를 계기로 일본의 대형 전자양판점들까지 상륙할 가능성이 높아 우리나라 가전유통시장을 장악해온 전속대리점의 위력이 급속히 약화될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메이커가 전속대리점의 유통마진 등을 감안해 결정하는 권장소비자가격은 더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는 상황이 닥칠 것으로 보인다. 유통업체간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가전제품 판매가격은 유통업체의 몫으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또 시장경쟁력이 약한 제품은 메이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유통업체들이 받아들이지 않아 즉시 도태되는 양상이 뚜렷해질 전망이다. 메이커가 독자적으로 구축한 가전유통망을 통해 소비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제품을 판매하는 식의 일방통행이 더이상 먹혀들지 않고 유통시장이라는 1차 관문을 통과해야만 제대로 판매할 수 있다는 얘기다.
최근 리딩3사가 대형 전자매장을 잇따라 개설하는 것도 유통파워의 급부상에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의 하나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대형 전자매장이 자가브랜드 위주에서 탈피할 수 없는 등 유통 전문업체들과의 경쟁에서 승산이 약하다. 결국 리딩3사도 더이상의 편법(?)을 동원할 수 없는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제품경쟁력을 끌어올리는 것만이 가장 정확한 대응책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윤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