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품업계, 세트업체 납품가 조이기로 몸살

『과거에는 통상적으로 연초만 잘 버티면 됐는데 요즘엔 시도때도 없이 가격협상을 요구해 정말 사업할 맛이 안납니다.』(S사 사장)

『말이 협상이지 일방적으로 인하된 가격을 제시하고 알아서 하라는 식이 대부분이며 아예 최저가 입찰제를 실시해 부품업체간 출혈경쟁을 유도하기도 합니다.』(D사 영업이사)

『고양이도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주고 쥐를 쫓는다고 하는데 최근 세트업체들의 가격인하 압력실태를 보노라면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듭니다.』(K사 전무)

긴 불황의 터널을 지나 최근 경기가 서서히 회복세로 접어들 조짐을 보이고 있으나 일반 부품업체들은 세트업계의 「가격 조이기」라는 강력한 복병을 만나 또 다시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국내 부품가격은 전자산업이 도약기에 접어든 80년대 중반부터 매년 쉬지 않고 완만하게 하락해 왔지만 최근엔 그 폭이 갈수록 커지고 있고 회수도 잦아지고 있다는 것이 부품업체 관계자들의 푸념이다.

실제로 인쇄회로기판(PCB), 저항기, 콘덴서, 트랜스, 소형모터 등 대부분의 일반 부품들이 최근 1∼2년 사이에 적게 잡아 30% 안팎의 가격인하가 이루어졌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수정디바이스 등 RF부품과 소위 잘 나간다는 통신부품, 칩부품도 예외는 아니다.

이에 비해 원부자재비, 인건비 등 주요 제조비용과 물류, 전기, 공업용수, 폐수처리, 금리 등 부수적인 비용은 큰 폭으로 올랐다. 일반 부품업체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이젠 세트업체들의 가격압력을 흡수할 여력이 고갈된 상태』라며 『계속되는 가격인하로 제조원가(MC)가 한계수준을 넘은 업종도 이미 상당수에 달한다』고 입을 모은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통상 한번 내려간 가격이 다시 회복되기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렵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만약 핵심 원자재가 국제적인 품귀로 가격이 대폭 상승한다면 고스란히 부품업체들이 떠안아야 할 형편이다.

세트업체들이 저임금국으로의 생산기지 이전과 함께 전략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글로벌소싱」정책도 결국 부품업체들엔 가격견제를 위한 또 다른 무기로 비춰지고 있다. 실제로 현재 대부분의 부품업체들은 『동종의 중국 및 동남아산 일본 부품에 공급가격을 맞추라』라는 세트업체들의 강한 압력에 시달리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악화된 근본이유는 지난 94년 말에서 95년 사이에 「슈퍼엔고」로 인해 국내 전자업계, 특히 반도체업체들이 사상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다가 작년부터 경기가 빠르게 하향곡선을 그린 데 따른 후유증 때문이라는 것이 부품업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즉 엔고가 엔저로 급반전되면서 국산 전자제품의 국제경쟁력도 하루 아침에 추락, 「효자아이템」이 졸지에 「鷄肋」으로 변했으며 이로 인해 세트업체들이 「10% 경쟁력 살리기」 「30% 비용절감」 등 다양한 원가절감의 명목아래 대부분 중, 소업체인 부품업체들에 대한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T社의 C사장은 『대기업들이 엔고의 외풍으로 한참 잘 나갈 때는 특별상여금 등을 무차별 지급하고 협력업체에 현금결제를 하는 등 부산을 떨어 결국 인건비 상승과 전문인력의 대기업 편중만을 심화시키더니 이젠 안되니까 가격압력으로 부품업체들을 구렁으로 몰고 있다』고 성토한다.

부품업체가 살아야 세트업체가 살고, 부품산업이 무너지면 세트산업도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것은 전자강국 일본을 이끌고 있는 것이 무라타, TDK, 교세라, CMK 등 수많은 부품업체들이란 사실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부품업계 관계자들은 『최근의 무차별적인 부품 가격인하 공세가 결국 세트업체들에도 득보다는 실이 많을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