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관람석] 래리 플린트

밀로스 포먼의 「래리 플린트」에는 주인공인 래리 플린트에 관한 감독의 견해가 아주 흥미롭게 표현돼 있다. 언뜻 이 영화는 포르노잡지 「허슬러」의 발행인(실존인물)인 래리 플린트가 표현의 자유를 외치며 벌인 20년에 걸친 법적 투쟁과 그것을 통해 얻어낸 승소에 관한 기록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 속에는 래리 플린트에 대한 감독의 비판적인 시선이 숨어 있다. 이 시선이야말로 전기영화 혹은 법정영화로 끝나고 말 수 있었을 영화에 생기를 불어넣는 힘이다.

감독의 이러한 관점은 이 영화의 포스터에서 잘 드러난다. 배꼽에서 무릎까지만 잘라내듯 찍은 여자의 나체, 삼각팬티로 간신히 성기만을 가린 그 나체에 축소된 래리 플린트(우디 해럴슨 분)가 마치 순교자 예수처럼 박혀 있는 포스터는 이 영화의 모든 것이다. 가령 포스터는 이 영화가 포르노에 관한 영화임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비유적으로 말해 포르노란 인간의 크기가 성기만한 크기로 부당하게 축소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한편 포르노 제작자인 래리 플린트는 포스터에서 자신을 순교자로 표현해 종교계를 격분시킨다. 아울러 래리 플린트는 포스터를 통해 자신의 팬티로 사용하고 있는 성조기를 보여줌으로써 권력자들을 분통터지게 한다. 래리 플린트의 일생은 권력자 혹은 종교계의 거물급 인사들과 맞서 벌인, 기나긴 한판의 싸움이다.

그러나 포스터의 표현주체는 래리 플린트가 아니라 감독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 순간 우리는 이 포스터가 심각한 자기도취증에 빠져 있는 래리 플린트에 대한 감독의 희화적 표현이었음을 알게 된다. 포르노산업이 큰 돈벌이가 되는 줄 아는 자, 즉 이미 막대한 돈을 벌어 거부가 된 자가 계속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서 더욱 노골적이고 자극적인 포르노를 제작하면서도 자신을 표현의 자유를 위해 싸우며 시대를 앞서간 반항아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밀로스 포먼이 래리 플린트를 위선적인 인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위선이란 래리 플린트가 맞서 싸우고자 했던 적이었음을 감독은 명백히한다. 래리 플린트는 자신이 사람들에게 늘 충격적인 존재로 인식되기를 희망한 고집불통의 사고뭉치이자 과시욕에 사로잡혀 있는 편집증 환자였던 것이다.

영화 「래리 플린트」는 우리에게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보장되고 있는가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를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가 장정일이 구속되는 그 시간에 이승희는 스타가 되고 있는 현실에 접한 우리는 매우 당혹스럽다. 소설가의 표현은 심각한 외설이 되어 단죄당한 반면, 포르노 배우의 노출은 오히려 「누드예술」로 윤색되면서 인기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장정일은 이승희로부터 한 수 배워야 한다. 외설을 쓰되 그것이 예술적 표현임을 강변하면 권력의 희생양이 되지 않는 위선적이고도 기만적인 현실, 바로 이것이 「래리 플린트」를 통해 읽을 수 있는 우리의 현주소다.

<채명식,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