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맨홀 (208)

가식을 통한 진실.

전등 스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사내도 아니었다. 그만큼의 술에 몸을 가누지 못할 혜경도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진실을 위한 가식이 필요했다.

그뿐이었다. 그 진실을 사내가 치밀한 계획 아래 논리적으로 추진한 것이었다면, 혜경은 자기 몸의 요구에 따랐을 뿐이었다. 남과 여, 그날 밤 그들의 진실은 오직 섹스였다.

뿌, 뿌-, 뿌.

퉁명스런 디주리두 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있었다. 긴 통나무에 입을 대고 입술을 떨어 연주하는 디주리두. 화면에서는 사마귀의 섹스가 계속되고 있었다.

네 시간.

화면 한쪽으로 자막이 나타났다. 네 시간째.

섹스의 시간과 정력이 비례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라면 사마귀는 분명한 경외의 대상이 될 것이다.

사내는 천장에 시선을 둔 채 손바닥을 펼치고 반질반질 윤이 나는 테라코타의 젖꼭지를 살살 쓰다듬었다.

좋은 느낌. 사내는 첫 밤을 지내던 그날도 서두르지 않았다.

1이 출력되었을 때의 프로그램대로 행동하면 되는 것이었다. 플로차트대로 움직이면 되는 것이었다. 중간에 잘못되더라도 플로차트대로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하면 되는 것이다. 그 처음은 진실. 진실부터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 진실은 섹스였다.

숙련된 투사는 성급하지 않듯이 사내는 천천히 움직였다. 먼저 옷을 벗긴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내였다.

스텝 바이 링크.

사내는 혜경에 대해 충분히 검토했다. 처음 본 순간, 일동은행 최고의 미인 혜경을 처음 본 순간부터 사내의 계획은 시작되었고, 그 접근방법이 바로 스텝 바이 링크였다.

바로 옆자리에 앉았던 제주행 비행기에서 사내는 자신의 새끼손가락 하나를 혜경의 몸에 자연스럽게 밀착시킬 수 있었다. 그 새끼손가락을 통해 혜경의 심리를 파악할 수 있었다. 링크를 위한 스텝, 일단 새끼손가락 하나면 되었다.

호주 원주민들이 불어대는 디주리두의 탁한 소리가 짧게 끊겼다가는 길게 이어졌다.

사내는 한손으로 테라코타의 젖가슴을 계속 쓰다듬으며 다른 손 하나를 자신의 아랫도리 쪽으로 내렸다. 이미 사내의 아랫도리는 꽂꽂하게 서 있었다.

그것 또한 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