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무역회관에서 통상산업부 주최로 열린 「반도체산업 민간협의회」는 주요 의제가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대책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 이제까지 정부당국이 개최한 여느 협의회와 다른 게 없어 보이지만 제도개선 의지면에서는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도높게 진행됐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 만하다.
무엇보다 이번 「민간협의회」는 전임장관 시절 간담회 형식의 「관민협의회」와는 달리 「공업발전법」이라는 母法아래 설치된 정식기구로 구속력을 갖는다는 것부터 다르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날 협의회에 참가한 삼성, LG, 현대, 아남 등 소자업체 대표는 물론 장비, 재료업체, 반도체설계 전문업체 관계자들의 요구사항은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이었다.
이번 협의회를 주관한 반도체산업협회의 회장자격으로 참석한 문정환 LG반도체 대표가 질문한 용수 및 전략난 해소방안이나 이윤우 삼성전자 대표의 장비, 재료 육성방안과 자금지원방안, 김영환 현대전자 대표의 해외투자 자금의 원활한 활용방안 등은 현재 반도체업체들이 안고 있는 가장 절실한 난제들이다.
문제는 당국의 제도개선 의지. 「검토해 보겠다」는 식의 말잔치가 무성했던 이제까지의 관례로 볼 때 통산부를 비롯한 재정경제원, 건설부 관계자들의 실천의지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임창렬 통산부 장관은 이와 관련, 회의 서두에서 『우리나라가 사상 처음으로 명확한 이유없이 반덤핑 혐의를 풀어주지 않는 것을 이유로 미국을 WTO에 제소한 것은 반도체 경쟁력 제고에 대한 정부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하며 『더 이상 관례나 제도에 얽매여 경쟁력 제고를 늦추거나 하는 사례는 없을 것』이라고 강조해 이번 협의회가 전에 없이 강도높게 진행될 것임을 예고했다.
이같은 예감은 회의가 진행됨에 따라 현실로 나타났다. 우선 상업차관과 외화대출 문제와 관련해 재경원 담당과장과 즉석에서 협의해 현재 오히려 국산 시설재 채용을 가로막는 「50% 사용시 차관허용」 등의 단서조항을 과감히 철페하고 반도체장비 가격이 워낙 고가인 현실을 감안, 외화대출의 한도도 현재의 10배 이상의 수준으로 상향 조정한다는 방안을 도출하는데 성공했다.
임 장관은 중소 장비업체들에 분양 및 임대가 가능한 전용공단 신규 조성문제에 대해서도 현재 대전 엑스포지역의 유휴지역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공단유치작업을 벌이고 있다고 말해 이르면 98년쯤에는 새로운 반도체공단이 조성될 것임을 시사했다.
그는 또한 용수, 전력 등 반도체 생산을 위한 기본 인프라 구축을 요구하는 업계의 의견에 대해서는 기존 생산인프라가 미흡하다는 것은 지역경기 활성화를 위한 지방자치제도의 기본 취지에도 벗어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건설부 관계자들과 협의해 반드시 개선하겠다는 쾌도난마식의 답변을 제시해 참석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아울러 대단위의 개발자금이 소요되는 재료분야는 연구기획사업에 포함시켜 중기거점사업으로 육성시키고 해외증권 발행요건 등을 완화해 해외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생산구조를 갖춰 나가겠다는 요지의 답변을 했다.
특히 핵심사안마다 수요조사와 소요자금을 항상 체크하는 자세는 이제까지 업계의 요구를 듣기보다 훈시(?)를 많이 해온 전시행정에서 분명 벗어난 모습이었다는 것이 참석자들의 한결같은 반응이었다.
『다시는 정부 때문에 기업의 경쟁력이 떨어졌다는 소리는 듣지 않겠다』는 임 장관의 마지막 인사말을 듣고 나오는 반도체업계 관계자들의 발걸음은 오랜만에 가벼워 보였다.
<김경묵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