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의 발전은 가치를 바꾼다. 우리나라의 경우 60년대 식량, 석탄, 수산이 주요산업이었다. 의, 식, 주 해결이 무엇보다 시급했던 시절이었다. 70년대 들어서는 섬유와 경공업이 경제의 주춧돌이 됐다. 노동력을 통한 임가공산업이 경제발전의 근간을 이뤘다. 80년대 들어서는 건설과 중공업, 전자, 조선이 산업의 핵을 이뤘다. 경제 인프라를 구축하는 모태가 된 산업이었다. 90년대초 자동차와 전자산업은 비약과 안정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산업으로 각광받았다. 그리고 90년대 중반 이후 우리 산업은 반도체와 정보산업으로 급이행했고 통신과 유통이 미래산업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2000년대는 어떤 산업이 각광받을까. 그 물음의 가장 앞선 대답은 단연 유통산업이다. 2000년대를 사이버시대로 부르는 만큼 정보SW산업과 유통산업이 경제를 이끄는 견인차로 대두될 가능성이 크다.
과거 10년 전만 하더라도 정보산업이란 단어 자체가 생소했고 유통은 간단한 물류와 그저 사고파는 정도로만 인식돼 왔다. 「산업」이란 어미를 붙이는 것조차 부끄러울 정도의 규모였다. 그러나 정보산업은 이제 어떤 산업과도 비교될 수 없는 「골리앗」이 되었다. 이와 함께 단순하게만 생각하던 유통산업도 무한한 부가가치와 발전가능성을 내포한 「꿈돌이 산업」으로 탈바꿈했다. 컴퓨터라는 과학기술이 가치를 변화시킨 것이다.
2000년대 유통산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대규모 자본을 바탕으로 정보통신이 결합된 유통산업은 최고의 부가가치를 지닌 산업으로 등장할 것이 확실하다. 이에 따라 세계 각국은 유통산업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유통산업을 단순하게 팔고사는 것만으로 인식하는 사이 자본력과 조직을 갖춘 외국의 대규모 업체가 어느 사이엔가 침범했다.
시장이 개방된 지난 2년여간 마크로, 카르푸 등 외국계 창고형 할인점이 국내에 들어왔다. 처음 개장 당시 외국 유통업체의 국내진출이란 충격으로 자주 입에 오르내렸지만 시간이 갈수록 당연한 것으로 인식돼 가고 있다. 오히려 가격과 서비스의 질에 만족한 소비자들의 발길이 부쩍 늘어난 상태다. 환경이 열악한 국내 유통업체들은 외국계 유통업체들의 국내진출을 위협으로 느끼지만 뾰족한 대응수가 없다. 「신토불이 유통」을 외치면서 국민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고작일 뿐이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다 보니 자연히 외국계 유통업체의 국내진출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국내 유통업체의 해외진출은 꿈도 못꾸는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여기에는 물론 구조적인 문제도 있다. 제조업이 유통을 좌우하는 현실이 가장 큰 장애다. 특히 전자유통의 경우 몇몇의 양판점을 제외하고는 아직까지 대리점이 유통의 실세로 대두되고 있다. 우리나라만이 가진 독특한 구조다.
또 대부분의 전자유통점이 영세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도 문제점이다. 막대한 자본력과 조직력으로 공격하는 외국 유통업체들에 맞서 수출은 차치하고 국내시장조차 지키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전자경기가 침체하고 자본력 있는 투자자들이 투자를 꺼려하는 분야가 전자유통으로 낙인찍힌다면 국내에서조차 생존하기 힘든 것이 전자유통의 미래이기도 하다.
지난 95년말 일본의 세계적인 전자유통사인 베스트전기의 국내진출 움직임이 있은 후 라옥스, 조신전기 등 일본의 유력 전자유통사들이 국내시장을 탐지해 갔다. 일본의 전자유통 업체들이 시장개방 원년부터 국내시장 진출을 노리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아마 국내 전자시장의 미래에 그나마 희망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됨에 따라 아시아 전자시장의 핵이 한국에 집중될 것이라는 분석이 그중 하나다. 거대한 중국시장의 교두보로, 또 한반도 통일이후 한국 자체만으로도 수요가 충분히 예측되는 시장이란 분석도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전자유통업계 해외진출 상황은 어떤가. 한마디로 첩첩산중이다. 면역기능이 떨어진 어린아이 수준이다. 철저한 부모의 보호아래 주는 밥만 먹어왔던 것이 현실이다. 제조업의 해외진출에 편승한 부가기능으로서 존재해 왔다. 베스트전기, 라옥스, 조신전기 등 일본의 전자유통 업체들처럼 해외진출을 위한 꿈은 사실상 먼 얘기다. 국내시장을 지키기조차 힘든 상황에서 수출은 과대한 상상에 불과하다.
유통은 자본이고 조직이다. 외국 유통업체가 국내진출을 계획했던 것도 상대적으로 싼 금리를 바탕으로 한 막대한 자본이 뒷받침돼 줬기 때문이다. 여기에 수년간 몸에 배어온 경쟁체제가 더욱 강한 체질을 만들었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의 현실은 주체가 되는 전자유통업체의 부실이 현실을 비극적으로 만든다.
전자전문 유통업체라고 손꼽을 만한 업체가 고작해야 다섯손가락 미만이다. 전자랜드21을 운영하는 서울전자유통, 세진컴퓨터랜드, 하이마트, C마트 등에 불과하다. 모두 내수용이다. 국내 전자시장을 위한 마케팅전략에 주력할 뿐이다. 수출의 몫은 제조업으로 넘겨지고 있다. 전국에 수십개의 지점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해외로 진출한 업체는 없다.
서울전자유통이 최근 중국시장 진출을 신중히 검토한 적이 있다. 전자유통시장이 광대하고 비교적 진출이 쉽다는 판단아래 취해진 계획이다. 그러나 중국시장을 노리는 외국업체는 많다. 어차피 경쟁을 치러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따라서 지금 전자유통업체들에게 필요한 것은 대외경쟁력이다.
전자유통업계에 필요한 대외경쟁력 확보는 무엇으로 이뤄지나.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첫째,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수출을 최우선으로 생각한 「70년대 정신」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팔아야 산다는 정신 없이는 국내시장에서 성장하는 데 한계가 있다』며 『지금이야말로 외국 전자유통업체의 진출에 맞서 국내 전자유통업체들은 해외진출로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둘째, 영양부족에 시달리는 국내 전자유통업체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다. 성공한 유통업체의 근간은 막대한 자본력이다. 현지 시장조사를 통한 유통구조의 분석과 적절한 투자가 뒤따라야 한다. 그러나 국내 전자유통업체들의 경우 투자의 여력이 넉넉하지 못하다. 그 숫자도 많지 않다. 대규모의 자본력을 배경으로 한 외국 전자유통업체와의 경쟁에서 한풀 꺾이고 들어간다. 따라서 해외진출을 위주로 국내 대기업과 연계한 전자전문 양판점의 신설이 시급하다.
셋째, 유통구조의 개선이 필요하다. 전자유통 하면 「꺾기」와 「밀어내기」로 대변되는 부정적 이미지를 씻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일본 전자유통업체인 다이와가 국내 전자유통시장 조사를 위해 현지조사단을 파견한 일이 있다. 다이와의 시장조사단이 내린 결론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밀어내기」와 「꺾기」가 그토록 성행하면서 시장이 존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들은 꺾기라는 유통방식을 한국에서 처음으로 배웠다고 한다. 비아냥투로 『한국사람들은 참으로 머리가 좋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여기에 불어닥친 가격파괴는 출혈경쟁으로 치달았다. 가격파괴는 세계적인 대세다. 유통단계를 줄이고 여기서 얻는 이익을 소비자에게 환원한다는 고무적인 유통혁신이다. 그러나 우리의 사정은 다르다. 유통단계의 축소를 통한 가격파괴가 아니라 경쟁업체를 이기고 살아남기 위한 전략으로 치닫는다. 결국 파산한다. 그렇다고 우리나라의 전자제품 가격이 다른 나라에 비해 싼 것도 아니다. 미국의 한 일간지가 조사한 세계 전자제품 가격비교 중에서 카메라, TV, 에어컨 등은 세계에서 비싼 나라로 순위에 들었다.
일례로 미국 시어즈백화점의 상표인 켄모어 냉장고 7백ℓ급의 경우 미국 현지가격은 9백99달러선. 이 냉장고가 한국에 오면 4백만원선이다. 같은 급 국산냉장고도 1백40만원선을 훌쩍 넘는다. 가격의 거품을 뺐다고는 하지만 경쟁이 되지 않는다. 여기에 전자유통업체의 세계화에서도 크게 뒤진다. 외국 손님을 맞기 위한 외국어교육 프로그램이나 현지 진출을 위한 문화습득 교육 프로그램은 거의 없다. 해외진출을 위한 유통전문가의 양성이 시급한 실정이다.
넷째, 정보통신를 통한 유통업체의 해외진출이다. 사이버 쇼핑몰의 구축으로 가상공간을 통한 해외진출을 모색하는 것이다. 통신을 이용한 유통은 이미 미래산업으로 점찍혀 있는 상태에서 가장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전략 중의 하나다.
2000년대 글로벌시대 유통산업의 대응전략은 「수출 드라이브」다. 외국 유통업체의 진출을 당연시 느끼는 것만큼 국내 유통업체의 해외진출도 당연시 보는 사고가 필요하다. 또 유통의 수출을 위해 가져야 하는 경쟁력 기반을 지금 다져야 한다. 유통산업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아니라 「가꾼 만큼 주는 나무」이기 때문이다.
<이경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