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5주년특집] 격변기 맞는 반도체산업

「적극적인 글로벌화만이 살 길이다.」

지난해부터 시장환경이 급변하면서 반도체업계의 생존전략이 크게 바뀌고 있다. D램가격 폭락, WTO체제 출범, 대만의 신규시장 진입 등으로 우리나라 반도체산업은 고도성장에 급제동이 걸렸다.

D램의 생산능력과 우수한 공정기술을 앞세운 국내 반도체산업은 지난해 D램가격 하락과 경쟁국들의 견제로 매출확대에 한계를 보였다. 게다가 그간 국내 반도체업계를 괴롭혀온 반덤핑 족쇄는 미국측의 억지성 요구에 밀려 여전히 유효한 상황이고 차세대제품 개발 역시 단독으로 해나가기에는 리스크가 점점 엄청난 수준에 이르고 있는 실정이다. 이 모든 환경이 국내 반도체업체들에 좀더 적극적인 글로벌 전략을 추진할 것으로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우리나라 산업가운데 반도체 만큼 글로벌화가 강조되는 산업도 드물다. 무엇보다 전체생산의 90% 이상을 수출시장에 의존해야 하는 시장구조 때문이다.

지난해 반도체시장은 개발, 마케팅 등 모든 것을 국제적인 협력없이 혼자 해나가기에는 어렵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 한해였다. 특히 D램비중이 거의 전부인 우리나라 업체인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반도체산업협회의 김치락 부회장은 국내 반도체업체들의 글로벌 전략의 필요성에 대해 이렇게 역설한다. 『2000년 반도체시장은 투자위험도 커지고 표준화 문제가 시장을 주도하는 최대 관건이 될 것이다. 특히 표준화는 유력업체간 협력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를 위한 공동개발, 마케팅은 물론 현지생산에 적극 나서야 할 시점이다.』

국내 반도체업계는 이런 이유 때문에 수년 전부터 현지생산을 위한 행보를 빨리해 왔다. 무엇보다 무역블록화에 대응하고 반덤핑 등 통상마찰 소지를 제거한다는 방침에서다. 또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게 업계의 목소리다. 중국, 필리핀, 포르투갈 지역에 진출한 조립공장은 현지의 저임노동력 활용과 함께 현지시장 공략의 교두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현대전자 마케팅담당의 한 임원은 『후발업체들이 어려움을 겪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마케팅 능력이다. 현지생산은 생산과 시장을 연결하는 글로벌 네트워크형의 이상적인 마케팅체제로 고객의 요구에 언제든지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라고 강조한다.

LG반도체의 한 임원도 『반도체업계의 글로벌전략은 R&D, 생산, 마케팅간의 시너지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도록 추진해야 한다. 우선 선진국의 축적된 기술인프라를 활용하고 원천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라이선스 계약은 물론 현지 기업인수 및 지분참여 등 좀더 과감한 방향으로 모색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삼성전자 전략기획실의 한 임원은 『국적을 초월한 현지 합작공장의 추진은 고객밀착형 마케팅 능력을 키워주고 막대한 투자리스크를 줄여주며 표준화를 위한 협력관계 구축에 기반을 마련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반도체투자는 이제 1개사 단독으로 하기엔 투자규모가 엄청나게 커졌다. 통상적으로 설비 투자비는 연간 매출의 30% 이상 수준에 이르고 개발비만도 10%를 상회한다. 16MD램 1개 라인 라인구축 때 소요비용이 10억달러대였다면 1기가D램은 최소 1백억달러를 넘는다는 게 일반적인 계산이어서 웬만한 유력업체라도 단독 투자는 무리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산업연구원의 주대영 선임연구원은 『국내 반도체업계는 막대한 투자리스크를 지역적으로 분산시키며 비메모리분야의 선진기술을 더욱 빨리 효율적으로 확보하는 한편 덤핑 및 지적재산권에 대한 적응력을 높이는 차원에서 95년 이후 해외 반도체 생산거점 확보전략을 펼치고 있다』고 전제하고 『시장환경의 급변추세가 두드러진 최근 들어선 글로벌화가 표준화 문제와 맞물리면서 가장 큰 생존전략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국내 반도체업체들의 해외생산기지 및 R&D센터 구축은 이 때문인지 몰라도 최근 들어 한층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특히 올들어 정부가 해외투자 규제조치를 잇따라 철폐키로 함에 따라 그간 주춤했던 반도체업체들의 해외공장 신, 증설 움직임이 활기차다.

정부당국은 지난 3월 국내업체들의 해외투자시 해외자금 차입을 용이하게 한다는 방침 아래 한도규정을 철폐한 데 이어 최근 그간 반도체업체들의 해외공장 건설에서 최대 걸림돌로 지적돼온 자기자본 비율을 지난달부터 철폐했다.

이에 따라 삼성, LG, 현대 등 반도체 3사는 올해부터 오는 2001년까지 국내는 물론 미국, 유럽, 동남아 등지에 D램을 비롯해 비메모리 파운더리 및 디스크리트 제품을 주력생산하는 8개 이상의 일관가공라인(FAB)을 신규로 구축할 예정이다.

특히 이같은 반도체 3사의 향후 해외투자가 최근 들어 비메모리분야로 집중되고 있는 것은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다. 반도체 3사는 미국, 영국 등지에 건립을 추진중인 현지공장의 생산주력제품을 비메모리로 전환하거나 해외유력 비메모리업체 인수를 통한 비메모리사업 강화 방안을 적극 모색중이다.

이는 해외투자를 시장확보나 양산성 면에서 유리한 D램위주로 전개한다는 당초 방침과 거리가 먼 것으로 최근 뚜렷해진 D램시장 위축세에 따른 대응책으로 풀이된다. 특히 반도체 3사는 해외투자가 활성화될 경우 비메모리 제품개발의 관건인 고기술 습득과 디자인 전문인력 보강이 용이해져 그간 국내 반도체산업의 최대 취약부분으로 지적돼온 D램위주의 생산구조에서 더욱 빨리 탈피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전자는 미국 오스틴공장에 내년까지 일단 D램 생산라인 1개를 구축, 초기시장 안정화를 도모한 후 늦어도 2000년까지 비메모리 제품 생산라인 2개를 추가로 건립할 예정이다. 삼성전자는 현재 오스틴 공장 부지에다 추가 인수가 가능한 옵션부지까지 합할 경우 30만평 규모로 늘어나 2개 라인의 추가구축이 가능하다고 보고 이곳에 각종 ASIC과 알파칩, 그리고 임베이디드 로직(MDL) 등 통신용 IC를 주력 생산한다는 방침이다. 이를 위해 비메모리개발를 위한 디자인 센터를 주축으로 한 대규모의 R&D 시설도 갖출 예정이다. 또 내년부터 전체 R&D투자의 40% 이상을 비메모리분야에 집중시켜 나가기로 했다.

총 19억달러의 영국 웨일즈투자를 추진중인 LG반도체는 아예 처음부터 D램을 제외한 멀티미디어 관련 비메모리반도체 생산라인을 구축한다는 방침이다. LG는 웨일즈공장에서 멀티미디어 만능칩으로 불리는 MPACT칩을 주력으로 DSP,그리고 자바칩을 생산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지속적으로 해외 R&D센터 개설에 나서 지난 3월 개설한 독일 디자인센터에 이어 올해만도 동구권과 아시아지역에 2∼3개를 추가로 개설해 연내 총 4∼5개의 R&D센터를 확보할 예정이다.

더 이상 국내에서는 FAB을 늘리지 않는다는 적극적인 글로벌 전략을 추진중인 현대전자는 미국 오레곤 공장은 예정대로 D램 전용공장으로 구축하고, 연내 진출예정인 스코트랜드 공장에서는 D램 생산 라인과 함께 0.35미크론이하의 초미세 회로선폭의 공정기술 적용이 가능한 비메모리 제품라인의 구축도 적극 검토중이다.

특히 해외 비메모리 제품 육성의 기본 방향은 심비오스사와 같은 경쟁력있는 유력업체 인수를 주력으로 하되 장기적으로 해외에서 운영중인 기존 비메모리사업부 가운데 경쟁력을 지닌 제품은 별도사업부로 분리, 집중 육성한다는 방침이다. 이를 위해 올들어 美현지법인 HAE내에 9천5백만달러를 투입해 MPEG사업부를 별도법인화 했다.

이같은 현지생산 추진전략과 함께 제품 플랫폼 중심의 전략적 제휴를 더욱 강화해 나가야 한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제품플랫폼은 컴퓨터의 운영체계(OS), 마이크로프로세서를 포함한 고부가가치 콤포넌트와 시스템을 말하는데 사실상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표준화의 관건이 된다.

제품 플랫폼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한 기업만으로는 안되고 시장을 지배하는 주도적인 기업들간에 연합이 필요하다. 또 이의 포함여부에 따라 향후 반도체시장에서의 사활이 결정된다는 점에서 적극적인 전략적 제휴가 반드시 요구된다는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따라서 반도체수요가 또다시 피크를 이룰 2000년 시장을 대응하기 위해서는 기술습득과 국내 수요상황에 기본을 둔 현지생산 위주의 기존 세계화 전략을 제품 플랫폼과 표준을 활용하기 위한 좀더 포괄적이고 적극적인 글로벌 전략으로 확대발전해 나가야 한다든 게 지배적인 시각이다.

<김경묵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