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5주년특집] 가전업계의 해외사업 체계화

글로벌 시대의 무한경쟁은 가전업계 구도를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요체다. 국제화라는 대기류 속에서 국내시장의 문이 활짝 열리고 또 이것이 국산 브랜드간 경쟁체제 와해로 이어지고 있는 요즘이 바로 무한경쟁의 예고탄이라 할 수 있다. 해외시장도 마찬가지다. 국내생산을 통한 수출형태가 현지생산, 현지마케팅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것이 다름아닌 글로벌 시대의 무한경쟁 속에 국내기업들이 뛰어든 모습이다.

우리나라 가전업체들은 이미 글로벌 무한경쟁이라는 늪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이 늪을 헤치고 스스로의 자리를 찾느냐, 아니면 늪 속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느냐 하는 문제만이 남아있다. 또 이 과정에서 국내는 물론 전세계 가전업계의 구도가 바뀌게 될 것으로 보인다.

무한경쟁에 뛰어든 가전업계의 경영전략은 현재의 위치나 그 수준에 따라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목표는 「정상에 우뚝 서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적어도 경쟁반열에서 떨어져 낙오되는 극한 상황을 맞아서는 안된다는 것이 가전업계 모두의 각오다. 그러나 구체적인 전략방향은 우리나라 가전산업을 리드해온 전자 3사와 오디오를 중심으로 한 중견 가전업체, 그리고 중소 가전업체에 따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삼성전자, LG전자, 대우전자 등 전자 3사의 경우는 리딩업체답게 「맞불작전」의 양상을 띠고 있다. 국내생산으로 채산성이 떨어지고 국제적인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다면 해외현지에서 직접 가전제품을 생산해 현지업체나 외국의 선발 진출업체들과 동등한 조건아래서 승부를 내겠다는 것이 첫번째 골자다.

국내 가전사업장이 더 이상 수출기지의 역할을 하지 않고 내수를 중심으로 한 차세대 가전제품 생산과 핵심기술 및 신제품 연구개발에 주력하는 형태로 탈바꿈하면서 해외사업장은 그 지역 시장을 겨냥한 가전제품을 개발, 생산하고 판매하는 독자적인 경영형태를 갖추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전자 3사는 또 해외의 주요 지역에 「본사」 개념의 지역본부를 구축하는 등 한국본사를 축으로 하는 현지완결형 경영시스템을 갖춰 체계화된 글로벌경영(글로컬라이제이션)으로의 변신을 추진중이다.

올 초 그룹의 지역본사 대표를 회장급으로 격상시키는 등 글로컬라이제이션 정책이 그룹차원으로까지 확산된 삼성전자의 경우 지난해까지는 해외 지역 책임자가 국내본사의 지휘를 받아 책임과 자율경영의 주체역할을 했지만 올해부터는 그룹 지역본사 대표의 지휘체계에 놓이는 변화를 맞고 있다. 더욱이 지역본사 자체가 그룹차원에서 글로벌 자립경영의 한 주체이자 회장급이 지역본사 대표를 맡게됨으로써 삼성전자의 지역총괄(해외경영)은 이제 현지에서의 경영정책 또는 전략을 수립, 추진하는 데 국내본사보다도 그룹 지역본사에 우선해야 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LG전자는 삼성과는 달리 현재 운영하고 있는 지역본부나 2000년까지 10개 권역에 구축할 지역본사의 운영을 국내본사가 중심이 된 자율과 책임경영체제를 유지할 방침이다. 이는 전반적인 해외경영 인프라를 감안할 때 국내본사의 지원없이는 해외 지역본사가 독립된 자율경영을 해낼 수 없을 뿐 아니라 인프라 조성에도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대우전자도 현재까지는 LG전자와 같은 형태를 띠고 있지만 이달 말 그룹회장단 인사와 함께 수면위로 부상할 그룹의 해외 지역본사가 글로컬라이제이션 추진방법에 큰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이는 대우그룹 총수가 무국적기업을 거론할 정도로 지역별로 별도의 독자경영체제를 구축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전자 3사가 글로벌 무한경쟁에 맞대응하는 전략 중에는 경쟁우위 가능성이 있는 주요 제품을 중심으로 펼치고 있는 「톱브랜드 전략」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 톱브랜드 전략은 전세계 시장에서 전자 3사 가전제품의 위상을 선두권에 확실히 올려놓겠다는 야심과 맥을 같이 한다.

최근 리딩 3사가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방식의 수출을 지양하는 대신 현지생산품을 중심으로 한 자가브랜드 판매비중을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삼성전자의 경우 이미 몇 년 전부터 가전제품 수출원칙을 자가브랜드로 전환한 데 이어 올해를 기점으로 OEM 수출물량이 거의 사라져가고 있다. 삼성은 특히 「세계 브랜드 창출」을 위해 올해부터 전사차원에서 힘을 집중하는 적극성을 보이고 있다. 컬러TV, 냉장고, 전자레인지 등 주요 가전제품의 「월드 브랜드」화를 위해 자원을 집중하고 브랜드명의 글로벌화, 세계 최고의 명품화, 월드 마케팅 전략수립, 국내외 공장 개편, 전세계 단일 정보망 구축과 같은 종합적인 경영혁신을 추진하고 있다.

LG전자는 그동안 해외시장에서 사용해온 「GoldStar」 브랜드를 내년 1월까지 단계적으로 LG(Leading Global) 브랜드로 완전히 교체하는 것을 시작으로 「단일화」된 브랜드로 톱브랜드의 이미지를 심겠다는 전략이다. 특히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와 중남미, 동유럽, 독립국가연합(CIS) 등 성장시장에서 이러한 전략을 먼저 성사시킨다는 전략아래 현지생산과 마케팅, 서비스 등 가전산업의 역량을 이들 지역으로 집중하고 있다. 세계시장에서 브랜드 판매비중도 오는 2005년까지 80% 수준으로 확대키로 정해 점진적인 톱브랜드 전략을 추진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대우전자는 중, 고가 시장에선 「DAEWOO」 브랜드로 고급 이미지를 실현하고 저가시장에선 별도의 브랜드를 사용하는 브랜드 이원화 전략을 통해 세계 톱브랜드 청사진을 그려가고 있다. 즉 5대 가전제품을 세계 톱브랜드 실현의 주무기로 삼되 25인치 이상의 고급형 컬러TV와 광폭TV, 입체냉장고 등 고급제품과 앞으로 출시할 멀티미디어용 정보가전 신제품 등을 중심으로 「DAWOO」 브랜드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또 이제부터는 OEM 수출을 지양하고 자가브랜드로 전환해야 톱브랜드 전략이 성공할 수 있다는 판단아래 올해에도 해외광고를 지난해보다 3배 이상 증가한 1억 달러로 책정하는 등 톱브랜드 전략에 시동을 걸었다. 자가브랜드 판매비중도 올해 55% 이상으로 크게 높인다는 전략이다.

중견 및 중소 가전업체들은 이들 리딩 3사와 여건이 다르고 힘이 약해 공격적인 전략을 펼치기가 곤란한 상황이다.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정상에 서느냐, 마느냐」의 부차적인 문제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라는 생존문제에 직면해 있다.

다국적 기업의 물량공세와 중국, 동남아 등지에서 들어오는 저가 외산제품에 밀려 가격 및 시장 경쟁력을 잃은 지 이미 오래며 그동안 대기업 OEM 공급에 의존하던 상당수의 업체들은 자신의 이름도 한번 제대로 가져보지 못한 채 문을 닫고 말았다. 남아있는 업체들은 비교적 외세를 덜타는 제품을 생산하는 곳인데 이도 지극히 전문적인 아이템을 갖고 있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따라서 중견, 중소 가전업체들은 위기탈출에 사활을 걸고 있다. 오디오 전문업체나 동양매직처럼 그나마 자체적인 유통망을 갖고 있고 그룹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중견업체들은 사업다각화와 외국기업과의 전략적 제휴 등을 통해 활로를 찾고 있다. 해태전자의 정보통신 분야 강화, 아남전자의 마쓰시타와의 협력, 동양매직의 가스보일러 및 냉장고 사업 신규진출 등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중소 가전업체 중에서도 우림전자나 유닉스전자 등 일부 업체는 이, 미용 기기에서 주방용품, 건강기기, 환경가전 등으로 사업품목을 넓혀 소수품목의 위험부담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다. 신일산업이나 한일전기 등도 선풍기 및 히터와 같은 계절상품 외에 음식물 탈수기, 전기밥솥, 이동식 에어컨 등 각종 생활용품으로 사업품목을 확대하고 있다.

일부 중소 가전업체들은 또 한편으로 독특하고 전문적인 아이템으로 기술력을 확보해 틈새시장을 공략할 계획이다. 대웅전기산업의 경우 국내 최초로 전기압력보온밥솥을 개발, 현재 전기압력밥솥 시장에서 50% 이상을 점유할 정도로 부상했으며 수입선 다변화 해제 시기를 겨냥, 외산에 대응할 채비를 하고 있다. 두원산업도 핸디, 스틱 겸용 진공청소기로 틈새시장을 개척해 나름대로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윤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