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새시장을 잡아라.」 안팎으로 경쟁력을 상실하고 있는 한국의 전자산업이 글로벌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묘안은 없을까. 국내 전자산업계가 안고 있는 이같은 공통의 문제는 최근들어 더욱 새삼스러워지고 있다. 공장, 빌딩자동화, 계측기기, 공작기계는 물론이고 원격제어 분야까지 외국업체의 공세가 더욱 거세지고 철도, 전력, 교통, 항공 등 사회간접자본 분야 역시 지멘스, 슈나이더, ABB, GE 등 이른바 거대 다국적 기업들이 내수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글로벌시대에 접어들고 있는 국내 산전업계의 어려움은 더욱 가중되고 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산전업체인 LG산전은 지난 5월 유압식 엘리베이터 분야에서 세계 최고 기술을 보유한 미국의 셈코사(CEMCO LIFT Inc.)의 기술과 자산, 그리고 특허권리 등을 총 1천3백만달러에 전격 인수했다.
국내 엘리베이터 업계를 대표할 정도로 기술력이 축적된 이 회사가 기업합병을 단행한 이유는 간단하다. 유압식 엘리베이터 분야에서 상대적으로 취약한 기술을 보완하기 위해 관련 기업을 인수, 세계 최고 기술을 확보함으로써 외국 선진업체와의 기술차이를 줄여보자는 의도였다.
초고속 승강기 개발 착수 셈코사 인수로 유압기술의 확보에 성공한 LG산전은 지금까지 축적한 로프식 기술과 모더니제이션(Modernization) 기술, 그리고 유지, 보수 서비스 능력을 갖춘 종합 엘리베이터 업체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이같은 기업 인수합병은 글로벌시대에 대비해 국내업체로서는 가장 손쉽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며 그 중에서도 전문분야, 전략품목에 대한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데 가장 유효하게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다.
국내 산전업계가 외국업체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시장을 잠식해 들어가기 위한 방법으로는 백화점식 제품 개발이나 판매보다는 더욱 전문화된 전략품목과 전략지역을 선정, 공략해 들어가는 집중적인 마케팅이 요구되고 있다.
글로벌 기술개발과 글로벌 제품생산, 판매망 확보는 2000년대 기업이 가져야 할 필수요건이다. 특히 내수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른 승강기업계의 경우 세계화 전략의 추진여부가 기업의 사활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오티스를 비롯한 선진업체들이 분속 8백m급의 초고속 승강기와 줄없는 엘리베이터인 리니어엘리베이터를 개발, 상용화하고 있는 현실과 비교하면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LG산전, 동양에레베이터, 현대엘리베이터 등 국내 대기업 3사가 초고속 승강기의 개발에 본격 착수한 것은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은 국내업체가 집중공략해야 할 대상이다.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 등 승강기산업은 오는 2000년까지 매년 10% 이상 증가해 20만대에 이를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미쓰비시, 히타치, 신들러, 오티스 등 4사가 70% 이상의 시장을 선점하고 있기는 하지만 국내업계가 파고들 시장이 얼마든지 있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분당 1백20 이내의 중저속 기종의 경우 선발업체들이 가격경쟁력 확보에 실패했고 중국내 업체들의 경우 기술부족으로 생산이 불가능한 만큼 중국내륙을 대상으로 판매, 애프터서비스(AS)망을 구축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한다.
승강기산업과 함께 국내 산전업계가 전략품목으로 삼고 있는 분야가 중전기기 분야, 특히 배전반 등 중저압기기다.
현재 국내 중전기기 기술은 선진국의 70% 수준인 데다 설계기술이 선진국의 50% 수준으로 열세를 보이고 있으며 선진국 수준에 근접하고 있는 품목의 경우는 대만이나 중국산 제품에 비해 가격면에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기술선진화와 함께 마케팅 전략도 글로벌화가 요구되고 있다. 그동안 중전기기 업계는 대기업을 중심으로 해외진출을 활발히 해왔지만 이제는 중소기업도 동반진출을 적극 추진하고 기업간 전략적 제휴도 활발히 해야 한다.
마케팅의 글로벌화에는 현지생산을 빼놓을 수 없다. 현지생산이야말로 세계시장에 진출하는 발판이기 때문이다.
이미 LG산전의 경우 현지 정부 등과 합작방식을 통해 인도네시아, 베트남, 중국 대련에 차단기 등 배전기기 생산공장을 건설, 올 연말까지 이들 3개 공장을 완전 가동할 계획이다.
업체 영세성 극복이 과제 LG전선과 대성전선은 이미 세계 유수의 전선업체들이 포진해 있는 베트남 시장에서 저가격, 고품질화 전략으로 현지 생산 및 판매에 성공했다.
MRI, CT전자혈압계 등 전자의료기기 역시 국내 산전업계가 글로벌시장에 대응해 공략해야 할 대상이다.
지난 90년 이후 생산과 수출이 매년 두 자릿수 이상 증가하고 있고 기존 전자의료기기 전문업체들도 꾸준한 기술개발 노력으로 각종 첨단 전자의료기기와 선진국 틈새시장 공략용 아이디어 상품들을 연이어 국산화, 국산 전자의료기기에 대한 대외 이미지가 크게 개선되고 있다. 그러나 국내 전자의료기기 업체들은 대부분 매출액 1백억원 이하, 종업원 50인 이하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등 영세성으로 인해 제품의 라이프사이클이 급격히 단축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선진국 업체들을 앞서는 효과적인 연구개발을 진행하기 어려운 것은 시급히 극복해야 할 과제다.
엘리베이터, 전력기기, 전자의료기 등이 글로벌시대의 대외공세용이라면 2000년을 불과 몇 년 앞두고 있는 국내 공작기계 업계의 화두는 내수시장을 지키기 위한 대일경쟁력 강화다.
오는 99년부터 수입선 다변화 품목이 전면 해제될 경우 일본에 대한 기술의존도가 높고 일본산에 비해 품질과 성능이 열세인 국내 공작기계 업계는 큰 타격을 입을 것이 확실하다. 그 중에서도 고급형, 대형기종, 특수전용기 등은 경쟁력이 더욱 떨어져 문제다.
이에 따라 대우중공업, 현대정공, 화천기계, 두산기계 등 공작기계 업계는 단기적으로 일본 경쟁업체에 대한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 분석함으로써 국내 영업 및 AS망을 단계적으로 재정비하고 확충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공작기계 업계는 해외시장 개척에 주력, 내수시장에서의 열세를 해외에서 보전하려는 전략과 기종이 일본산보다 다양하지 못해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선 영업부문과 밀착, 고객의 요구에 부합하는 제품을 개발하려는 움직임도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중장기적으로는 취약한 부품 및 소재산업을 강화하는 것이 공작기계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핵심이란 인식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첨단 계측기 국산화 순조 내수시장에서 외국업체들의 제품경연장이 되고 있는 계측기기 업계는 2000년을 맞아 무너질대로 무너진 내수시장을 수성하기보다는 독자적인 제품개발로 해외시장에서의 틈새시장 확보에 모든 것을 걸고 있다.
LG정밀은 10메가에서 2.6기가 대역의 이동통신용 시험장비와 세계적으로 수요가 크게 늘고 있는 개인휴대통신(PCS)용 종합계측기 개발에 본격 착수했으며, 테스콤의 경우 무선호출기 전용 자동측정장비를 세계 처음으로 개발해 외국 통신업체들로부터 기술력을 인정받고 세계 유수의 통신업체에 수출하고 있다.
국내 산전업계가 기술경쟁력, 브랜드이미지 등의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글로벌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전략사업에 집중하는 한편 미래지향성 차별화 기술의 습득과 선점, 성장재원 확보를 위한 자금흐름 중심의 경영전개 등이 필수적이다. 또한 글로벌시장에 적응할 수 있는 인재육성, 글로벌 전략제품 개발, 본사와 해외현지법인을 하나로 묶는 글로벌 네트워크 구축, 선진기업과의 전략적 제휴를 통한 신사업, 글로벌 연구개발체제 구축 등도 뒤따라야 한다.
<정창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