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산업 생산 세계 제4위의 국가」 「가전산업 생산 세계 제2위의 국가」 「국내 생산, 수출 제1위의 산업」.
국내 전자, 정보통신 산업의 위상을 일컫는 화려한 수식어다. 지난 59년 진공관식 라디오 조립을 시작으로 태동한 국내 전자산업은 실로 앞만보고 달려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80∼90년대에 접어 들어서면서 성장률은 다소 더뎌졌지만 지난 70년대까지만 해도 연간 50∼60%대의 성장률을 오르내리는 진기록을 작성하기도 했다. 그리고 특히 지난해에는 단일산업으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5백억 달러의 수출을 목전에 둠으로써 많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는 컬러TV, VCR, 전자레인지 등 가전제품과 반도체 D램, 모니터, PCB 등의 전자부품 그리고 컴퓨터 주변기기 및 유선기기로 대변되는 산업용기기의 탄탄한 수출기반에서 비롯된 결과임에 두말할 나위없다.
특히 반도체 D램의 주력수출군으로서의 비중은 가히 엄청난 것이었다. 지난해 전체 전자수출은 4백12억달러. 이중 반도체 수출은 전체의 43%인 1백78억4천만 달러에 달했다. 컬러TV 등을 비롯한 가정용이 78억 달러, 컴퓨터 주변기기 등 산업용이 83억9천만 달러, 모니터 등 일반부품이 71억 달러라는 실적에 견주어 보면 반도체에 대한 수출 비중이 어느 정도인가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은 외형적 성장은 값싼 노동력과 내수기반을 통한 수출지상주의에서 비롯됐다. 산업의 패러다임을 발빠르게 내다보며 탄력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지난해 하반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수출 부진은 전자산업을 총체적 위기로 몰아 넣고 있다. 올들어 전자수출은 마이너스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가격하락에 따른 반도체 수출 부진 등에 의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지만 또다른 한편에서는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린 결과라는 지적도 있다. 특히 외형성장을 거듭할때 내실을 다져야 했는데 그 시기를 놓쳤다며 정책입안자들의 거시적인 처방부재를 질타하는 지적까지 있다. 한마디로 경쟁력을 잃고 허덕이고 있는 것이다.
국내 전자산업의 위기인가 아니면 새로운 출발의 기회인가.
지난 95년 출범한 세계무역기구(WTO)는 새로운 무역환경을 요구하고 있다. 국경을 초월한 글로벌 경영의 필요성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니며 기술라운드에 의한 기술개발의 노력은 무한경쟁에 있어 시급한 과제로 등장하고 있다.
그 좋은 사례의 하나. 국내 정보통신산업은 서비스의 경쟁확대로 큰 폭의 성장세를 거듭했다. 지난해 국내 통신기기 시장규모는 46억3천만 달러로 95년에 비해 25%가 넘는 성장률을 기록했다. 그러나 통신시장의 외국산기기의 수입의존율은 해마다 높아지고 있다. 지난 90년 30% 정도였던 통신기기 수입의존율이 지난해에는 50%를 넘어섰다. 신규 통신사업자들의 시설투자가 집중되고 있는 올해에는 수입의존율이 더욱 심화될 것이란 분석이다. 이는 결국 내수기반을 통한 기술개발과 생산구조 고도화의 시기를 놓쳐버린 것을 의미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가전수출이 곤두박질치고 있는 것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올들어 컬러TV, VCR 등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인 이들 품목의 수출이 큰폭의 감소세를 나타내고 있다. 미국은 물론 새로운 황금시장으로 떠오르던 러시아지역에 대한 수출까지 막히면서 컬러TV의 경우 7월말 현재 수출은 전년대비 30.5%가 감소한 8억 달러에 그치고 있다. 자사브랜드에 의한 이미지를 강력히 구축해야 하는 데도 불구, 마케팅의 국제화를 게을리 한 결과인 셈이다.
그나마 부품은 나은 실정이나 여전히 구조적인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국내 전자산업이 위기의 파고에 휩싸이고 있는 것이다. 반도체를 대체할 차세대 제품군을 찾지 못하고 있으며 생산구조의 고도화는 매우 더딘 속도로 이어지고 있다. 국제 경쟁력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가격 및 디자인 분야도 높은 임금상승과 절대적인 전문 인력부족으로 여전히 제 자리를 맴돌고 있으며 기업활성화를 위한 정부의 규제 완화정책도 아직까지 성과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산업 경쟁력을 되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전자, 정보업계의 생산구조의 고도화가 시급한 실정이다. 지금이라도 후발개도국의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서는 공정혁신을 통한 원가절감의 노력과 제품 차별화에 힘써야 한다.
특히 미래제품을 대비한 기술개발 노력도 간과할 수 없는 부문. 현재 산, 학협력으로 추진되고 있는 고선명TV(HDTV)의 개발은 인텔리전트 TV 및 PCTV의 개발 추진과 함께 세계 선두그룹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큰 혁신제품 개발사업이다. 산업공동화의 우려로 논란을 빚고 있는 해외투자 부문도 국내산업의 경쟁력 강화와 장기적인 성장기반 강화라는 측면에서 질서있게 체계적으로 추진돼야 한다. 예컨대 기술혁신과 합리화를 통해서도 국제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는 품목은 해외로의 생산기지 이전이 최적의 방안일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더욱이 마케팅능력 향상은 가격, 품질, 성능과 함께 중요한 경쟁요소로 작용함에 따라 이부문에 대한 투자를 강화해야 할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와 관련, 업계의 전문가들은 자사브랜드의 적극적 개발과 공동 브랜드의 사용, 해외 판매회사의 설립, 해외전시회의 적극 참여, 그리고 유통을 장악하고 있는 해외기업과의 공급계약을 통한 시장개척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문하고 있다.
이밖에 국내개발부품의 상호구매 및 완제품 업계와 부품 업계의 협력강화가 절실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완제품과 부품을 각자 개발하기 보다는 상호 밀접한 협력체제를 구축, 개발하는 것이 효율적일 수 있으며 수요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정부의 전자, 정보통신산업 육성을 위한 장기비전 전략마련이 시급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장기적 경제성장을 위한산업구조의 건전화 변화를 위해서는 정부의 이같은 비전제시는 필수적이라는 것.
정부가 최근 CDMA 관련제품을 반도체에 이은 제2의 수출 주력상품으로 육성할 계획을 세우고 다각적인 비전을 제시한 것은 좋은 사례중의 하나일 것이다. 국산 전전자교환기(TDX)의 수출이 줄어들고 있는 반면 CDMA관련기기의 수출이 크게 늘고 있는 점에 착안한 이같은 비전제시는 상당한 실효를 거두면서 앞으로 여타품목으로 크게 확산되어여 할 것이다.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나라 전자, 정보통신산업은 이제 성장이냐 퇴보냐 라는 중대한 기로에 직면해 있다. 경쟁력을 되살리기 위한 고임금, 저효율의 생산구조를 서둘러 개편하고 내수기반이 확대되고 있는 통신산업에 대한 전반적인 육성책 마련이 시급하다. 특히 고부가산업으로의 구조조정은 절실한 과제중 하나다. 더불어 기업의 발목을 잡는 기업활동 규제책들은 조속히 철폐돼야 할 것이다.
이같은 문제점을 개선하고 기업체질을 획기적으로 바꾸는등 경쟁력향상에 총력을 기울여 나간다면 위기는 또다른 기회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란 게 산업관계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모인·최상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