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국내 컴퓨터산업은 양질의 노동력을 무기로 숨가쁜 성장을 거듭해왔다. 그러나 컴퓨터기술이 급격히 발전함에 따라 PC 및 주변기기의 개발주기가 최고 3개월로 단축되면서 세계 컴퓨터환경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됐다.
이같은 상황에서 PC 및 주변기기 핵심기술을 외국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국내 컴퓨터산업의 기반은 갈수록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경쟁국인 대만이 저가를 앞세워 세계 시장을 무대로 공세를 강화하는 한편 세계 유수 PC업체들도 한층 진보된 기술력과 대량생산에 의한 저가정책을 전개하면서 국내 컴퓨터산업 기반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는 전체 경제에서 컴퓨터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95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컴퓨터 부문 매출은 1백1억달러로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2%에 그친 반면 대만의 경우 1백58억달러로 6.5%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싱가포르는 17.4%, 말레이시아는 9.5%에 달해 컴퓨터산업이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한국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대만을 비롯한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주요 동남아 국가의 경우 컴퓨터산업이 경제를 이끌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이들 신흥국가는 우리나라가 잠시 주춤하는 사이 이미 컴퓨터산업의 국제경쟁력에서 우리를 크게 앞서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세계 컴퓨터산업에서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 3위의 정보기기 생산국으로 자리잡은 대만은 이제 컴퓨터 부문에서 우리나라보다 한발 앞선 선진국으로 평가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PC의 핵심기기인 주기판은 대만산이 65%를 차지하고 있고 모니터는 57%, 키보드는 65%, 마우스 72% 등으로 세계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이처럼 대만이 세계 컴퓨터산업을 좌우할 만큼 괄목성장한 배경에는 나름대로의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우선 컴퓨터산업을 국책전략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 우리나라와는 달리 정부가 앞장서서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정부와 기업이 공조체제를 긴밀히 유지해 부품을 공동구매하는 것은 물론 해외기술인력을 적극 유치하고 각 기업에 우수인력들을 재배치해 일찍부터 컴퓨터산업 관련 첨단기술개발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대만의 10여개 노트북PC 전문업체들은 업체당 평균 10여명의 개발 및 생산인력을 확보하면서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있는 제품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해 이들 업체가 생산한 노트북PC는 3백만대이며 올해는 4백만대 수준으로 노트북PC 단일품목으로만 50억달러 이상의 수출실적을 거두고 있다. 대만은 이러한 컴퓨터 전문인력을 활용해 컴팩, IBM 등 세계 유수 컴퓨터 관련업체들에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방식으로 제품을 공급하는 것을 비롯해 제품사양이나 아이디어만을 전달받아 제품 디자인 및 부품을 자체 조달해 생산하는 ODM(오리지널 디자인 매뉴팩처)방식을 이용하고 있다.
대만의 컴퓨터산업이 성장할 수 있었던 또다른 이유는 중소기업들이 컴퓨터 부품산업의 저변에서 급변하는 세계 시장의 조류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 최적의 제품을 적기에 공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적절한 역할분담과 부품을 대량으로 공동구매해 제품 원가를 최대한 낮춰 가격경쟁력을 확보하면서 세계 시장을 급속히 잠식하고 있는 것은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대만과 더불어 싱가포르도 정보기기산업 분야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주변기기 강국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80년대 초 미국 하드디스크 드라이브(HDD)업체인 시게이트가 싱가포르에 진출하면서 퀀텀, 웨스턴디지털 등 굴지의 업체들이 잇따라 공장을 설립, 전세계 시장의 45%를 양산하는 세계적인 HDD 생산거점으로 부상했다. 이에 따라 싱가포르 경제에서 HDD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날 뿐만 아니라 최근까지 싱가포르의 정보기기산업을 이끌어온 견인차 역할을 담당했다. 이같은 세계 유수의 HDD전문업체들이 싱가포르에 대거 포진하면서 이들이 보유한 첨단 기술을 습득, 동남아지역에서는 가장 뛰어난 HDD생산 노하우를 축적하고 있는 나라로 손꼽히고 있다. 싱가포르에서 또하나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PC의 멀티미디어화에 필수불가결한 사운드카드. 이 품목은 특히 사운드카드시장의 쌍두마차로 불리는 싱가포르의 크리에이티브와 아즈텍사가 전세계 사운드카드 시장의 90% 이상을 석권하고 있다.
이밖에 말레이시아는 페낭을 중심으로 HDD를 비롯한 주변기기 생산업체들이 다양하게 진출하고 있으며 필리핀도 일본의 주변기기업체들을 대거 유치해 주변기기 부문에서 신흥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에 반해 10년 전만 해도 세계 최대의 컴퓨터생산기지로 각광을 받던 한국은 대만과 싱가포르 등에 밀린 나머지 좁은 내수시장에서 만족해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PC의 경우 가격경쟁력을 상실함은 물론 품질, 디자인, 브랜드이미지 등에서도 일본을 비롯한 이들 경쟁국에 비해 열세를 보이고 있는 게 사실이다. 단지 모니터, CD롬 드라이브 등 일부 주변기기 품목에서만 경쟁국에 비해 품질면에서 앞서 있을 뿐이다. 특히 수출주도 품목으로 여겨지는 HDD의 경우 생산기반이 취약해 국제경쟁력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최근들어 일부 PC 및 주변기기업체를 중심으로 미국과 일본, 유럽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아직은 역부족이라는 감이 없지 않다.
또 그동안 국내 컴퓨터산업은 자본력을 앞세운 대기업 중심으로만 편중된 결과 중소기업의 성장기반이 약화되면서 부품생산 기반이 매우 취약해 경쟁국에 비해 뒤처지는 구조적인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따라서 우리나라 컴퓨터산업의 경쟁력 회복을 위해서는 일본이나 대만 등 이미 세계 컴퓨터생산기지로 확실한 위치를 굳힌 나라들과 가격이나 물량공세로 직접 부닥치기보다는 이들과 차별화한 부가가치 상품을 새로이 개발해 수출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실제 한국은 반도체, 메모리, 박막트랜지스터 액정표시장치(TFT LCD) 등 컴퓨터에 들어가는 핵심부품들을 자체 개발, 생산해 이들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컴퓨터 및 주변기기의 국제경쟁력을 충분히 갖출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재 대만산에 잠식당하고 있는 주기판도 PC의 경쟁력을 좌우한다는 면에서 이에 대한 보호 및 육성도 시급한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국내 컴퓨터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정부와 기업이 얼마나 강력한 의지를 갖고 문제해결에 임하느냐에 달려 있다. 즉 경쟁국들처럼 정부가 직접 나서서 독자적인 기술개발과 전문인력양성을 위한 환경을 마련하는 한편 업체들 간에도 정보공유 및 기술교류 등을 통해 상호협력, 보완하는 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에 이어 세계적으로 핵심부품을 자체 생산하고 있다는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는 국내 컴퓨터산업은 정부의 대대적인 육성정책과 함께 국내 기업들 스스로 경쟁대상이 국내가 아닌 해외업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경쟁력을 높이는데 주력한다면 그 미래는 결코 어둡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양승욱·김영민 기자>